“유산 보존의 시작은 의미 있는 요소 찾아내는 일에서부터”
도시적 경관과 유산이 담고 있는 유·무형 가치 함께 보존해야
국가유산수리기술자(실측설계)라는 직업은 여전히 낯설다. 이름만 들어서는 도면을 그리는 직군으로 오해받기 쉽지만, 김미진 건축사는 “실측설계는 그리기보다 먼저 이해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현장에서 마주하는 일은 오래된 건축물의 구조와 형태, 주변의 경관과 맥락, 그리고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까지 되짚는 일이다. 진해 근대역사문화공간, 인천 답동성당 등 그의 작업이 지나간 자리는 유산의 외형뿐 아니라 그 속에 깃든 이야기까지 함께 남는다. 실측설계는 곧, 사라지는 것들을 기억하게 만드는 방식이기도 하다.
Q. 국가유산실측설계기술자라는 직무가 흔히 도면을 그리는 직업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조사와 분석이 핵심이라는 점을 말씀을 주셨는데요. 이 직무가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는지 말씀해 주세요.
국가유산 실측설계의 개념과 시작, 그리고 지금 어떤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를 설명드리겠습니다.
‘실측설계’란 ‘실측(實測)’과 ‘설계(設計)’가 합쳐진 용어로, 사전적 의미를 풀이하면 ‘실제로 측량하여 수리 계획을 세우고, 이를 도면 등으로 작성해 명시하는 일’입니다. ‘국가유산수리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국가유산 수리’란 국가유산에 대해 보수, 복원, 정비 및 손상 방지를 위한 조치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같은 법에서 ‘실측설계’는 국가유산 수리 또는 기록 보존을 목적으로 실측조사 및 고증조사 등을 거쳐 실측 및 설계도서 등을 작성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업무 내용을 살펴보면, ‘실측(實測)’은 국가유산의 현재 물리적 상태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사해 파악하는 작업입니다. 먼저 각종 측량기기를 활용해 대상 및 주변을 실측하고, 조사 목적에 따라 적용 기법, 사용 재료, 변위 및 변형, 현 상태 등을 꼼꼼히 조사합니다. 이어 실측조사 결과를 분석해 수리의 원인, 훼손 위험이 있는 보존 요소, 수리 범위 등을 파악하는 단계로 이어집니다.
‘설계(設計)’는 고증조사와 연구를 바탕으로 보존해야 할 가치를 도출하고, 이에 적합한 수리 방안을 계획해 설계도서 및 보고서 등을 작성하는 작업입니다. 국가유산실측설계기술자는 각기 다른 형식과 상황에 놓인 국가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오랜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보존 철학과 수리 방안을 지속 고민하고 연구해 나가는 건축사입니다.
Q. 국가문화유산실측설계의 개념과 직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실측설계는 어떻게 시작되어 현재까지 이르렀는지에 대해서도 설명 부탁드립니다.
우리나라에서 실측설계의 시초로 볼 수 있는 사례는 1956년 무위사 극락전 해체수리공사입니다. 당시에는 제도적인 틀이 마련돼 있지 않았지만, 업무의 본질적인 개념으로 보자면 실측설계에 준하는 모든 작업이 수행됐으며, 그 내용이 수리공사 보고서에 상세히 기록돼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제도적인 측면에서 문화재수리기술자 자격제도는 1962년에 처음 마련, 1970년 ‘문화재보호법’ 제정을 통해 자격시험의 응시 요건과 면접시험이 도입돼 본격적으로 시행됐습니다.
이후 1982년에는 문화재수리기술자 중 실측설계 분야에 한해 응시 요건이 ‘건축사 면허 소지자’로 변경되면서, 자격 요건이 한층 강화되는 방향으로 제도가 정비됐습니다. 이는 실측설계 분야가 다른 문화재수리기술자 분야와 달리, 건축물과 시설물 전반을 포괄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건축법 및 건축 관련 제도에 대한 전문적 소양이 반드시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제1회 건축사 자격시험은 1965년에 시행됐으며, 당시 건축사법에 따라 건축사면허증이 발급됐습니다. 이 시기에 배출된 건축사들이 이뤄낸 긍정적인 성과가, 약 20년 후 문화재수리기술자 자격제도의 강화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재’와 ‘국가유산’이라는 표현을 함께 사용한 것은, 2024년 5월에 있었던 큰 체계 전환 때문입니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 제정 이래 유지되어 온 문화재 체계가 ‘국가유산’ 체계로 전면 개편되면서, ‘문화재’는 ‘국가유산’으로, ‘문화재청’은 ‘국가유산청’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이에 따라 ‘문화재수리기술자’도 ‘국가유산수리기술자’로 변경됐습니다. 국가유산수리기술자 중 실측설계 분야는 자격명으로 ‘국가유산수리기술자(실측설계)’로 표기하며, 일반적으로는 ‘실측설계기술자’ 또는 ‘국가유산실측설계기술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Q. 최근 수행하신 진해 근대역사문화공간과 답동성당 관련 용역은 각각의 성격이 다르면서도, 국가유산을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프로젝트를 진행하시면서 특히 어떤 점에 주목하셨는지 말씀해 주세요.
두 프로젝트는 체계 전환 이전에 수행된 것이지만, 변화하고 있는 유산(遺産)의 개념과 확장된 보존 가치들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진해 근대역사문화공간은 다수의 국가등록문화유산과 그 일대의 경관을 포함한 ‘면(面)’ 단위 유산입니다. 따라서 개별 유산뿐만 아니라 가로 경관, 도시적 경관을 각각 다루되, 이들이 상호 연계될 수 있도록 실효성 있는 정비안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역사적 근거와 유산의 현황은 계획 수립의 핵심적인 기초가 되기 때문에, 심도 있는 학술연구와 실측조사를 통해 보존 가치를 분석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고려한 것은, 근대기에 형성된 구도심지와 개별 유산이 지닌 유·무형의 가치를 선별해, 보존 대상과 범위를 확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조성 당시의 원형은 아니더라도, 특정 시기의 생활상을 대표하거나 역사적 사건 및 인물과 연관된 부분까지를 보존 대상으로 구분했습니다. 또한 개별 유산에 얽힌 이야기들을 구술 채록하고, 이를 실측·고증조사 결과와 함께 비교·분석함으로써 각 유산이 지닌 사회적 가치도 밝히고 기록했습니다.
답동성당 관련 프로젝트는 성당 전면의 경사지에 공원을 조성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이는 국가유산인 성당뿐만 아니라, 그 일대의 도시적 경관까지도 역사적·문화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해안가 언덕 위에 세워졌던 답동성당 주변의 매립 과정과 도시화 과정을 고증함으로써, 경관 회복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었습니다.
도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던 성당의 입지와, 일대 어디에서든 볼 수 있었던 성당의 전경은 반드시 회복해야 할 경관적 가치라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따라 차폐된 성당 전면은 개방감 있게 열어주고, 시선을 방해하는 시설물은 최소한으로 배치하는 방향으로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또한 공원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이미 철거된 건물이긴 하지만, 민주화운동 등 지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가톨릭 회관의 벽체 일부를 수습해 공원의 가벽에 기록과 함께 남기는 방안도 제시했습니다.
이 두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사회적 가치와 주민들이 공유하고 있는 지역의 장소성, 시대성, 도시적 의미 등에서 유형 유산을 보존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실감했습니다. 유형 유산을 매개로 삼아, 그 속에 담긴 무형의 가치들이 자연스럽게 전달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Q. 마지막으로, 국가 문화유산 실측 설계라는 길을 걸어오시며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무엇인지, 또 이 분야에 관심 있는 후배 건축사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도 부탁드립니다.
“할머니의 목걸이는 가족 이야기와 할머니를 떠올릴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라는 한 학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저도 요즘 국가유산의 보존 작업이 궁극적으로는 그 유산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의미 있는 요소들을 찾아내고 이를 보존함으로써 유산의 가치를 드러내는 일이 점점 더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성수동에 가면, 오래된 상가주택을 리모델링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한 카페 입구에 이런 소회가 적혀 있습니다.
“...과거의 구조 속에서 새 것이 줄 수 없는 가치를 발견했다... (중략) ...세월을 기억하는 훌륭한 소재였다....” 일선에서 오래된 건축물을 다뤄온 건축사님들의 작품과 글을 볼 때마다, 유산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많이 배우게 됩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저 또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셈이겠지요. 일일이 기억하고 인사를 드릴 수는 없지만, 새 것과 과거의 것이 멋지게 어우러지는 건축사님들의 좋은 작품들을 늘 응원하고 기다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