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기술력과 북한 자원으로 좋은 건축시장이 형성될 것”

▲ '주체사상탑'과 '평양 광복거리' 설계에 참여했건 장인숙씨. 그는 북한 여성 최초로 '김정일표창'을 수상하기도 했으나, 지난 1997년 아들의 권유로 탈북하게 됐다.  ⓒ손석원 기자

<주요약력>
-1941년 生
-평양 고등건설전문학교 졸업
-평양김책공업대학 운수공학부 졸업
-평양도시설계사업소 근무(2급 건축기사)
-함경북도 온성 북부지구탄광설계사업소 근무
-'주체사상탑' '평양 광복거리' 등 설계 참여
-북한 여성 최초 '김정일표창' 수상(10여개 표창 수상)
-1997년 탈북
-평화통일 탈북인연합회 회장 역임
-탈북여성모임 진달래회 회장 역임
-현재 사단법인 큰샘 명예회장

북한은 김정은 정권하에서 예측할 수 없는 행보를 계속하고 있지만 한국을 포함한 주변국들은 통일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포격 사태이후 남북관계는 매우 경색된 상태로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으나 정부는 이산가족 상봉이나 드레스덴 선언등과 같이 화해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타진하고 있다.
이제는 국내 건축계도 통일에 대한 준비를 차근차근 준비해야 할 때이다. 통일을 염두에 둔 충분한 준비과정이 없이 갑작스러운 통일이 우리 앞에 왔을 때 북한의 재건과 건축현대화 사업에 앞장서야하는 한국의 건축계는 많은 어려움과 혼란을 맞이할 것이다.
북한건축의 실상과 북한 건축시스템에 대한 정보는 매우 제한되어있어 그 큰 흐름을 파악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이번호에서는 북한에서 온 여성건축인 장인숙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봄으로써 북한 건축의 이해에 대한 첫 발을 내딛어보고자 한다.

Q. 본인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북한에 있을 때 도시계획과 토목 분야에서 활동한 설계전문가입니다. 한국에 온지 15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1956년도 중학교를 졸업할 당시에는 6.25전쟁이후 전후 복구사업으로 인하여 건설기술자에 대한 수요가 대단히 많았습니다. 그래서 고등중학교에 가지 않고, 건설전문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고 그 후 평양 김책공업대 운수공학부를 졸업하였습니다. 대학졸업 후 평양도시설계사업소에 들어가 30년간 도시계획과 교량설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평양도시설계사업소에서 평양의 주체사상탑 건설을 맡게 되었고, 주체사상탑 구조분야의 설계를 맡았습니다. 북에서는 어떤 건축물이나 도시설계를 할 때 절대로 혼자서 할 수 없고 여러 전문가 집단이 해야 합니다. 저도 사업소 소속으로 이 건설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제가 남한으로 귀순했을 당시 ‘주체사상탑 설계자’로 언론에 나왔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북한에서는 개인 설계자는 부각될 수 없고 집단의 이름으로만 실적이 발표됩니다. 어쨌든 이 주체사상탑 건설 참가로 인해 ‘김정일 표창’을 수상했는데, 당시 첫 수상자이기도 했습니다. ‘김정일표창’을 받은 사람은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모든 것이 보장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참고로 저는 당에서 광복동 거리 설계 등으로 표창을 10여개 정도 받았습니다.

Q. 한국에 오게 된 계기와 과정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 남편의 계급이 남한으로 따지면 ‘대령’과 ‘준장’사이 계급인 대좌였는데, 터널공사를 주로 맡아 진행하던 군인이었습니다. 남편은 일하던 중 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당시 4살, 7살, 10살, 13살 네 명의 아들과 저를 남기고 그렇게 떠났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아버지 없이도 열심히 공부하여 명문학교에 진학했습니다. 큰아들은 김책공업종합대학에 입학한 후, 대학1년 때 소련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둘째 아들은 인민무력부기술종합대학에 다니다가 독일 공군대학으로 유학을 갔고요. 셋째 아들은 아버지의 공과가 인정돼 만경대혁명학원에 입학했습니다. 만경대혁명학원은 김정일 친위부대를 키우는 곳입니다. 막내는 평양의 일고등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1980년대 후반 동독, 폴란드 등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되었습니다. 동구권에서 개혁이 생기다보니, 당시 당은 유학생들을 전원 북으로 송환조치를 했습니다. 그런데 소련에 있던 큰아들이 유학 당시 한국기업인들과 교류를 하면서 한국의 발전상과 체제의 우월성을 알게 되었고, 당의 송환조치를 거부하고 한국에 망명을 했습니다.
그렇게 큰아들이 귀순을 하니 가족들이 순식간에 반역자 가족이 되었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24시간 내 평양 추방조치가 내려졌고 트럭에 실려 함경북도 온성에 위치한 ‘동포탄광’으로 보내졌습니다. 온성은 ‘아오지탄광’ 바로 옆입니다.
가족들이 온성에 도착해 탄광으로 들어갈 운명에 처하게 되었는데, 탄광에 한번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년말에 도착하여 잠시 대기하던 중 둘째 아들이 다니던 대학의 선배가 그 지역 북부지구탄광청 부청국장으로 일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둘째 아들이 찾아가 사정을 얘기했습니다. 사정을 들은 부청국장은 탄광으로 가족들을 보내지 않고, 북부지구 탄광설계사업소에서 근무할 수 있게 배려해주었습니다. 그때 제가 만50세 때였고, 탄광설계사업소에서 5년을 근무하고 정년퇴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탄광설계사업소에서는 공장설계, 갱도설계 등을 맡아서 근무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김정일 표창도 받고 그래서인지 어느 정도 대우를 해주었으나 아들들은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한국에 망명한 큰아들이 중국을 통해 남은 가족에게 연락을 취하고 탈북 할 것으로 권유 했습니다 .결국 귀순을 결심하고 중국 도문(국경도시)을 통해 탈북하게 되었습니다. 탈북을 모색하던 중 둘째 아들이 처갓집의 밀고로 체포되고 저와 나머지 두 아들 만 탈북 해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지금 북한에 있는 둘째 아들은 생사를 알지 못합니다.

Q. 한국과 북한의 건축에 대한 차이점과 디자인이나 기술적인 차이점에 대해
한국에 와서 놀란 점이 건축물 지을 때 모든 것이 기계화가 된 점이었습니다. 한국의 건설현장은 일하는 사람이 보이지를 않아서 공사가 중단된 것처럼 보였는데, 건물이 빠른 속도로 지어지는 것에 무척 놀랐습니다. 북한의 공사 현장은 인부들이 개미떼처럼 달라붙어서 모든 일들을 인력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콘크리트를 기계로 타설하는데, 북한은 전부 사람이 일일이 삽을 가지고 작업합니다. 북한에서는 아파트의 경우에는 공장에서 부재를 만들어서 조립식으로 짓고 있습니다. 즉 벽체부재를 하나씩 붙여서 짓습니다. 지하 기초를 위한 땅 파는 작업도 북한은 기계 없이 인해전술로 합니다. 주체사상탑을 지을 때 지하 14미터를 기계의 도움 없이 사람들이 다 팠습니다.
다음으로 한국에는 외벽자재가 참 다양한데, 북한은 그렇지 못합니다. 건축물들 대부분 외벽을 타이루(타일)로 처리를 합니다. 그리고 지방을 가면, 소형블록이나 진흙블록, 석탄재 블럭 등으로 마감을 합니다.
외부 모양 같은 경우는 한국은 참 다양합니다. 그러다보니 건축물 높이가 들쑥날쑥 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구획단위로 설계를 해야 하기 때문에 건축물의 모양과 크기가 모두 일정합니다.
그 다음으로 북한에서는 당과 김정일이 병원건축의 병실 개수를 몇 개로 해야 할 지 까지 결정을 다 했습니다. 예를 들어 500개의 병실을 만들고자 김정일한테 보고하면 “쩨쩨하게 500병상이 뭐야? 더 만들어라”면서 앞에 ‘1’자를 하나 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병원은 1,500병상의 병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Q. 북한의 건축사제도 있다면, 그에 대한 것과 아울러 북한 내에서 건축사의 사회적 위상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북한에는 건축사제도는 없고 ‘건축기사’가 있습니다. 건축기사는 급수가 있습니다. 급수는 1급부터 6급까지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면, 제일 낮은 단계인 6급을 줍니다. 상급으로 올라가려면 3년마다 한 번씩 시험을 치러야하고 시험 과목은 ‘전공과목’과 ‘인접과목’을 봐야합니다. ‘인접과목’이란 것은 역학 등입니다. 그런데 급수 올리기가 정말 힘듭니다. 승급시험에 합격을 못하면 한 급수 내려갑니다. 그리고 다음 시험에 합격을 해야 원래 급수로 복귀가 됩니다. 쉽게 말해 3급 건축기사가 정기적인 시험에 합격을 하지 못하면 4급으로 강등이 되며, 시험에 붙으면 3급을 유지하다가 3년 뒤 2급 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됩니다. 그러다보니 북한의 건축기사들은 자신의 급수를 유지하고 또 승급하기 위해 꾸준히 자신을 각성하고 매우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한 급수 올라가는데 보통 2∼3번씩 시험을 치러야 합니다.
1급 건축기사 중 선발된 소수의 사람은 ‘인민건축가’라고 합니다. 인민건축가는 대단한 신분으로 북한에도 몇 명밖에 없습니다. 1급은 국장급이나 차관급 월급이 지급됩니다. 다음으로 2급은 ‘공공건축가’라고 칭하며, 월급은 그다지 높지 않았지만, 간부진료권이나 보급품 등에 있어서 혜택이 있습니다. 간부는 3급 건축기사부터 가능합니다. 저는 6급부터 시작해서 2급건축기사까지 취득했었습니다.
3급 이상 건축기사에 대해서는 국가적으로 많은 예우를 해줍니다. 출장 시 국가에서 출장비를 정산해주며, 열차 이용 시 딱딱한 침대칸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앞에서 말했듯이 2급 이상은 병원에서 ‘간부진료권’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는데, 1급은 ‘1급 간부진료과’, 2급은 ‘2급 간부진료과’에서 진찰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병원 대기시간도 빨리 받을 수 있기도 하구요. 북한에서의 건축기사의 지위는 급수에 따라 차등을 두지만 높은 편입니다.

Q. 만약 통일이 된다면, 북한의 노후화된 건축물들은 어떻게 관리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이는지요
아마도 대부분 고쳐서(리모델링) 사용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의 건축물들은 구조 자체는 안전합니다. 전후에 소련의 기술자들의 기술지원을 받아 건물을 많이 지었는데, 벽체의 두께가 60cm나 되는 등 구조가 매우 튼튼하게 지은 건물이 많습니다.
평양 같은 경우만 해도 도시구획은 잘 되어있지만, 그 외 지역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리고 북한은 모래, 자갈, 석회석, 철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하고, 시멘트 공장이며 철근공장등 건설 자재공장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공장을 돌릴 전기나 석유등이 없어서 오랜 기간 공장이 가동되지 못하고 서 있습니다. 통일이 되어 남한의 전기나 석유가 지원이 된다면 풍부한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건설자재를 북한에서 직접 생산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북한의 자원과 남한의 기술력과 만나면, 좋은 건축시장이 형성될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북한에는 건축물을 지을 곳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한국의 건축사들은 통일이 된다면 할 일이 무궁무진합니다. 북한에서는 한국의 건축 기술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평양에서만 살다가 동포탄광으로 와서 보니 낙후된 건축물들이 너무 많이 있었습니다. 특히 탄광지역에는 ‘하모니카집’이 많이 있습니다. ‘하모니카집’이란 건 낮은 층수에 길게 지어진 건축물입니다. 집에 들어가면 부엌이 있고 그 안에 바로 방이 한 칸만 있는 구조입니다. 북한 전역에 산재한 이러한 집합주택을 리모델링 해야 합니다.

Q. 한국에 온 북한의 건축사들이 많이 있습니까?
의외로 한국에 온 북한 건축사는 거의 없습니다. 대한주택공사에서도 북한 건축사를 찾아서 간담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어렵게 4명의 북한 출신 건축기술자를 섭외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저 이외에는 실제로 건축 기술자가 아니었습니다. 군대에서 석재를 담당했던 사람이 한 명 있었고, 건설현장에서 인원을 배치해 주던 사람, 상하수도를 맡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건축설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Q. 한국건축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도시계획이 좀 조잡한 것 같습니다. 건축물의 높이가 일정하지 않고 들쭉날쭉 한 점이 너무 조잡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한 블록에 큰 건물과 작은 건물이 너무 섞여있고 같은 대로변이라도 층수 차이가 많이 나는 건물이 나란히 서 있어서 북한의 평양의 풍경과는 너무 다릅니다. 인접해있는 건물의 형태나 외장도 너무 다양하여 좀 혼란스럽습니다.
또한 남한의 건축물에는 간판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북한 같은 경우 1층에 대부분 잘 정돈된 간판이 설치되어있습니다. 주로 상점들이 있는 ‘편의봉사시설’의 간판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건물은 간판이 옥상까지 가득 붙어있는 것을 보면 좀 규제를 해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또한 한국의 도로는 경사가 심한 곳도 있어서 위험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북한은 허용구배가 있어서 일정한 경사도 이상의 지역에는 도로나 건물을 지을 수 없습니다. 거의 평지에만 도로구획을 하고 건축을 합니다.

Q. 북한에도 대한건축사협회와 같은 단체가 있는지요
네. 있습니다. ‘조선건축가동맹중앙위원회(이하 조건위)’라고 있습니다. 그곳 위원장은 국가건설위원회도 겸하고 있습니다. ‘조건위’는 민간기구이고, 국가건설위원회는 정부기관입니다. 저도 조건위 회원이었습니다. 조건위에서는 ‘전국건축가대회’란 행사도 개최했는데, 제3차 전국건축가대회에서 제가 처음으로 김일성과 같이 사진을 찍기도 했었습니다.

Q. 끝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옛날 제가 건설 분야를 전공으로 택했을 때 주위 사람들이 “여자가 무슨 건축․토목을 하느냐”고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건설분야를 택한 것을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사람은 죽어서 이름은 남기고, 호랑이는 가죽을 남긴다’고 했습니다. 내가 살아서 설계한 결과물을 후손들에게 전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내 후손들이 주체사상탑을 보며 “우리 집안 할머님께서 이 탑을 설계했다”라며 좋아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긍지를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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