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화재 참사 후속입법 ‘건축안전특별법안’ 제정 본격화
건축계 “현장 영향력 제한적인 설계자가 추후 사고발생 시 모든 걸 책임지는 꼴”
지난 9월 11일 김교흥 국회의원이 대표 발의한 ‘건설안전특별법안’ 내용 중 시공 과정에서 현장여건에 따라 필연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는 공사비, 공사기간, 가설구조물, 안전시설물에 대한 책임을 설계자에게 부과한 것을 두고 건축계가 “과도하고 불합리한 조항’이라며 한목소리를 냈다. 김 의원 발의안이 알려지자 9월 29일까지 진행된 국회입법예고에는 350여 명의 건축사들이 ‘반대’ 입장을 밝혔다.
건설안전특별법 제정안은 정부가 올해 4월 발표한 ‘건설안전 혁신방안’의 후속조치로서 발주자, 설계자, 시공자, 감리자 등 건설공사 전 주체에게 안전관리의무를 부과한 것이 핵심이다.
정부가 산업안전보건법 등 이미 여러 법에서 안전 관련 규제를 하고 있는데 건설안전특별법안과 같은 법을 추가적으로 만드는 건 국내 건설현장 안전이 여전히 부실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이미 올해 1월부터 ▲높이 2미터 이상의 안전설비가 없는 건설현장 ▲비계 등 시설물 설치가 적합하지 않아 붕괴사고 우려가 높은 곳 ▲가연성 물질을 취급하는 곳에서 화기 작업이 동시에 진행돼 화재 위험이 있을 경우에 근로자 스스로 작업을 멈출 수 있는 ‘근로자 작업중지권’까지 법률로 명문화했다.
산업재해 통계에 따르면 건설현장에서 매해 400명 이상의 근로자들이 사망하는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산업재해 사고사망자는 5년 동안 13.8%가 감소한 반면, 건설업 사망자는 1.4% 감소하는 데 그쳤다. 정부는 산업재해 사망자 중 건설업 사망자가 50% 이상을 차지하는 가운데, 최근 38명이 사망한 이천 화재사고가 발생한 것을 계기로 건축법과 건설기술진흥법 하위법령 개정 절차와 더불어 ‘건설안전특별법안’ 제정이라는 특단의 카드까지 꺼내들었다. 궁극적으로 현장 근로자들에게 안전한 작업환경을 제공하겠다는 계획인데, 국토부가 이 법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오는 11월 법안심사를 거쳐 연내 국회를 통과할 가능성이 있다.
◆ 건설공사 안전관리는
시공자의 책무
건설안전특별법안이 건설공사 각 주체들의 ‘관리 역할과 책임 구분’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구성원들 간 첨예한 의견차가 예상된다. 제정안 내용 중 건축계의 가장 큰 반발을 사고 있는 점은 발주자 또는 시공자가 해야 할 공사기간 및 공사비용 산정 의무, 그리고 동바리·거푸집·비계와 같은 가설구조물을 포함해 안전시설물 등의 공사 안전관리 의무를 설계자에게 부과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대한건축사협회 건축법제국은 ‘건설공사 안전관리는 시공자의 책무’라는 입장을 분명히 하며, ‘현장에 참여할 수도 없는 설계자가 추후 사고발생 시 모든 걸 책임지게 하는 법안’이라고 강조했다. 건축법제국은 “안전시설물은 설계가 끝난 후 시공단계에서 시공자가 책임지고 수행해야 하는 업무다. 공사비용 및 기간도 완료된 설계에 근거해 발주자가 안전성과 경제성, 공사의 규모·특성, 현장여건 등을 고려하여 시공자와 협의해 결정할 사항이다”라고 밝혔다. 설계자의 손을 떠나서 현장여건과 공정계획에 맞춰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데 무슨 수로 설계자가 비용과 기간을 산정하고 책임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발주자 책임 떠넘기기’라는 비판도 나온다. 제정안은 “정정순 의원이 지난 9월 1일 대표발의한 ‘건설기술진흥법 개정안’의 의결을 전제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건진법 개정안은 ‘발주자의 적정 공기 산정 의무화’ 도입을 뼈대로 하는데, 사업 각 주체들의 책임을 규정한 건설안전특별법에서는 이러한 발주자의 공사기간 산정 의무를 엉뚱하게 설계자에게 부과하고 있어서다. 건설현장에서 발생하는 사망사고의 상당부분이 공사기간을 단축하려고 무리하게 진행한 작업에서 발생하는 상황에서 설계자에게만 과도한 책임을 묻는 셈이다.
현행 법령상 가설구조물, 안전시설물을 설계도서에 반영하는 것도 건축사가 해야 하는 업무가 아니다. 건축사법 하위 행정규칙인 ‘공공발주사업에 대한 건축사의 업무범위와 대가기준’상 규정된 건축사의 업무범위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다만, 서울시 등 일부 지자체에서는 건설기술과 관련한 용역업무를 관리하는 법인 건설기술진흥법 제48조(설계도서의 작성 등)와 제62조(건설공사의 안전관리)를 준용해 가설구조물에 대한 설계용역 관리를 하고 있다. 법에 없다 보니 과업내용서에 비계·동바리·거푸집 등 가설구조물의 구조검토를 포함해 설계도서를 작성하도록 건축사에게 요구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사실상 토목공사 관리법이라 할 수 있는 건설기술진흥법상 정의된 ‘설계’업무가 “건축사법에 따른 설계는 제외”하고 있다는 점에서 법에 근거하지 않고 강제하는 지자체 임의규제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더더욱 추가 대가 없이 계약심사 시 가설물 설계서를 건축사에게 요구한다는 점에서 제도개선 요구가 큰 상황이다. 이는 건설공사가 토목공사뿐 아니라 건축공사를 포함하며, 건축이 건축법과 건설기술진흥법 두 법에 이중적으로 관리되면서 빚어지는 혼란이기도 하다. 건설안전특별법도 가설구조물에 대한 건설기술진흥법상의 설계자의 책무를 건축법상 설계자(건축사)에게까지 부과한다는 점에서 법체계상 맞지 않다.
◆ 대한건축사협회,
서울건축포럼 “산재 사망 1위 주범은
‘동네 건축’, 건축사 위탁 시공관리,
소형 건설업면허 신설 등
실효성 가질 방안 마련돼야”
대한건축사협회 관계자에 따르면 대한건축사협회와 새건축사협의회, 한국건축가협회, 한국여성건축가협회, 서울건축포럼 등이 TF를 구성하고 건설안전특별법 제정 관련 대응에 나섰다. 대한건축사협회를 비롯해 최근 서울건축포럼도 제정안에 대한 반대의견서 및 진정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 공공건축가인 A 건축사는 “법안 취지와 배경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다만, 산재 중 50%가 건설사고 사망자이며, 이 중 공사비 120억 이하가 74.3%, 20억 이하가 53.8%라는 점에서 사실상 산재 사망 1위의 주범은 ‘동네 건축’이다. 이들은 건축주 직영이거나 건설사업자 면허대여에 의한 사고가 대부분으로 ‘익명 공사자’들의 공사다. 건설현장 사고발생 근본 원인을 따져 법적 실효성을 가질 수 있도록 법안 수정 및 보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어 “소형건설업 면허 신설, 건축사 위탁 시공관리 등 법적 실효성을 가질 수 있는 방안을 배제한 채 시공 과정상 설계자가 발주자, 시공자, 감리자 고유의 업무에 개입하게 하면 업무상 충돌 및 책임소재 등을 두고 갈등과 혼란이 발생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