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이후의 설계실(Architectural Studio)
코로나19로 야기된 온라인 스튜디오 교육의
집단적 경험(Collective Experience)은
새로운 방식과 도구를 창의적으로 만들어내는
상상력의 원천 될 것
90년대 중반 콜롬비아 건축대학원 학장 베르나르 츄미(Bernard Tschumi)에 의해서 주도된 페이퍼리스 스튜디오(Paperless Studio)는 일종의 실험적 시도였다. 이는 컴퓨터 3D 모델링, 고속 인터넷의 보급, 종이 모델과 도면으로 수행되던 전통적 스튜디오의 변화를 예측한 파격적인 제안이었으며 많은 주목을 받았다. 건축 스튜디오의 학생 개인에게 제도판 대신 고성능 워크스테이션을 지급하고 단말기 앞에 앉아 모니터로 소통하는 스튜디오의 풍경은 당시 낯설고 획기적인 모습이었다. 2000년대 이후 개인용 컴퓨터 시장의 폭발적인 증가와 다양한 3D소프트웨어의 출현으로 학생들이 개인컴퓨터를 스튜디오의 작업공간에 배치하며 작업을 수행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었다.
30년 전 미국의 한 건축대학에서 미래의 건축교육을 위해 실행되었던 낯설고 파격적이었던 실험이 기술의 발달과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자연스러운 풍경으로 변화된 것이다. 90년대에 츄미의 상상은 도면이 사라지고 컴퓨터로 디자인하는 미래였지만 지금의 현실은 사뭇 다른 형식으로 실현되고 있다. BIM(Building Information Modeling)과 전자문서(eBook)의 발달로 인해 도서들이 디지털파일로 대체되는 건축환경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츄미의 의도 속 페이퍼는 도면(drawing)에 한정된 것이었지만 우리의 미래는 모든 종이도서가 사라지는 페이퍼리스로 실현되어 가고 있다. (실제로 도서(圖書)란 그림(drawing)의 도(圖)와 문서(documents)를 나타내는 서(書)의 합성어다.)
최근의 스튜디오 풍경은 어떠한가? 단순히 캐드프로그램이 손도면을 대체하던 시대에서 더 나아가 휴대용 컴퓨터, 디지털 필기구를 지원하는 태블릿, 개인용 3D프린터 등의 새로운 도구들이 하루가 다르게 등장하여 스튜디오의 풍경을 변화시키고 있다. 옐로우 페이퍼를 찢어가며 수십 장의 스케치를 하고 핀업하여 모형을 만들던 모습이 점차 태블릿 하나를 손에 들고 설계의 개념을 설명하며 실시간으로 3차원 속 모델을 드론의 뷰로 보여주면서 크리틱을 받는 학생들의 모습으로 보편화되어가고 있다.
세상의 변화는 우리가 그 변화를 의식하기도 전에 아주 조금씩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점진적 변화는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큰 사건으로 인한 도약을 통해 다음 단계에 진입한다. 현재 건축 교육계는 자의적 변화가 아닌 감염병이라는 위협적 사건에 의해 야기된 타의적 변화에 직면했다. 코로나19의 폭발적인 확산으로 인한 물리적 교육공간의 폐쇄는 건축을 포함한 예술교육에서 교육자 모두가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를 던지고 학생들에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도전을 주었다. 전국의 건축스튜디오가 동시에 물리적인 접촉과 공간을 상실해버린 예상치 못한 사태는 여전히 전통적 교육방식에 익숙한 교수진이나 비교적 새로운 IT기술에 익숙한 교수진 모두에게 새롭게 적응해야 하는 어려운 환경임이 분명하다. 학생 역시 이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의 스트레스는 크게 다르지 않다.
처음 SNS로 대화를 시작하여 다중 통화로 연결되고 시행착오 끝에 화상연결에 성공하는 과정을 거쳐 더욱 효율적인 상호소통이 가능한 크리틱을 위해 디지타이저와 태블릿 같은 IT기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가상의 공간이 자연스럽게 생성되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상 소통 공간의 효용성과 한계점 역시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코로나 이후의 변화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는 교육환경의 변화를 겪으면서 전통적 설계공간과 작업방식에 대한 결핍이 커져 이전의 방식이 고수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의견이 있는 반면 또 한편에서는 새로운 IT를 활용한 공간의 확장(공간의 초월을 의미)이 야기하게 될 물리적 스튜디오 공간의 축소를 우려하기도 한다.
우리는 아직 코로나19 감염증 확산이 종식된 이후의 삶의 변화를 알지 못한다. 이것은 사회, 경제, 문화, 교육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며 특히 교육에서는 학교와 교수진의 역할, 교육방식까지도 재편성하는 등 우리의 인식을 확장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스튜디오 기반의 건축 교육이야말로 필연적인 변화를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 이전에 새로운 IT기기를 크리틱에 활용하는 학생들이 낯설어 보였다면 이후에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될 것이며 불필요하다고 애써 외면하며 사용을 회피했던 도구들이 이후에는 우리에게 훨씬 친숙한 도구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코로나19로 야기된 온라인 스튜디오 교육의 집단적 경험(collective experience)은 새로운 방식과 도구를 창의적으로 만들어내는 상상력의 원천이 될 것이다. 감히 예상하건대 코로나 이후에는 과거에 없던 새롭고 창의적인 교수법들이 등장하고 새로운 도구들의 사용빈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과거 제도판을 설치했던 데스크 공간을 컴퓨터가 점유했듯이 이제는 그 곳을 새로운 작업을 위한 도구들이 점유하게 될 것이며 스튜디오 내부로 한정되던 학생들 간의 소통은 외부로 확장되어 주변, 지역, 국경을 넘어 양방향으로 소통하게 될 것이다. 과거 컴퓨터의 도입으로 인해 문서가 점차 사라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종이수요가 더 증가하였고, 인터넷으로 인해 물리적 업무 공간이 점차 사라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전 세계적으로 업무 공간의 수요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고 있듯이 변화는 항상 우리의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건축교육에서 물리적 스튜디오 공간의 비중이 점차 줄어들 것이라는 예견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과 달리 새로운 교육 형태와 교육도구들의 등장은 스튜디오공간을 지금까지 본적 없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시킬 것이며 그 변화 속에서 건축스튜디오의 물리적 공간은 여전히 건축교육의 중심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