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협회라는 나무에서 떨어지는 감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나무는 항상 힘겨워 보이지만,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쉬운 일이니 앞서서 줄서지 않을 수 없지요. 부끄럽게도 그 중에 저도 버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무슨 심보란 말입니까. 그냥 억울합니다. 바보처럼 건축이라는 옷을 입고 한눈 팔지않고 외길을 걸어왔는데, 세상은 그걸 알아주지 않네요. 제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의 문제라고 핑계대고 싶습니다. 선배들은 왜 한치 앞도 못 내다보고 듣기만 해도 설레는 이 건축의 장을 쪼그라든 파이로 만들어놨을까요? 후배들은 왜 부나비마냥 제 몸 타는 줄도 모르고 덤핑시장에 몸을 던지고 있을까요? 원망을 넘어 짜증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 선배가, 그 후배가 곧 제 모습임을 알아 차리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딸아이가 고3이 되었습니다. 이젠 자신의 진로를 결정해야만 합니다. 장난처럼 ‘건축은 어때?’라고 던져 보았더니 정색한 표정의 ‘NO'라는 답이 돌아옵니다. 갑자기 아이라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초라하게 다가옵니다. 아무리 애써 보아도 지난 10년의 제 모습에는 그리 높은 점수를 줄 수가 없습니다. 절반은 이 바닥에 대한 불만으로 채워져 있겠지요. 소양 없는 건축주, 매너리즘에 빠진 시공자, 벽창호 같은 공무원, 자기주장만 있는 직원들까지. 어깨 위로는 서푼어치의 대가보다 곱절은 넘어갈 의무감, 책임감만이 내려앉는 것 같아 억울했습니다. 그렇지만 부정할 수도 없는 현실입니다.
건축. 그거한번 잘해보겠다고 잘나가던 직장 그만두고 만만찮은 학비 깨먹으며 다닌 대학원 생활이 새삼 후회스럽습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징징대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어깨 늘어뜨리고 풀린 눈으로 망연히 컴 화면만 바라보고 있다하여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 다녀온 거래처 임원의 방에는 세계지도가 걸려 있었습니다. 사우디 아라비아 프로젝트, 인도네시아 지사를 말씀 하시더군요. 그 순간 제방에 걸려있는 포항시 전도가 떠올랐습니다. 포항시 전도의 뒤로 사라져가고 있는 저의 꿈, 저의 세상지도에 대한 희미한 흔적으로 코끝이 시큰해져 왔습니다. 저도 한때는 큰 꿈을 꿨었지요.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를 걷고 로마포름을 누비며 앞으로 펼쳐질 원대한 나의 건축을 꿈꾸고 또 꿈꾸었습니다. 피곤한 줄도 모르고 밤을 지새운 숱한 날들이 있었습니다. 유지만하면 잘하는 거라는 말을 위로로 알고 버텨온 지난 10년 세월은 저를 꿈조차 꿀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것일까요?
이젠 세상을 향해 핑계대는 일조차 지겨워졌습니다. 이왕 발을 담근 것이 아니겠습니까. 살아온 날들의 반 이상을 투자해 걸어온 길입니다. 다른 길을 알았다면 다른 선택을 했겠지요. 남들은 썩은 동아줄이라 합니다. 빨리 놓아버리는 것이 그나마 살 길이라고 쉽게들 말씀 하십니다. 그렇지만 그럴 용기는 더더욱 없는 것이 저라는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나쁜 것은 없습니다. 맥 빠지는 말들로 서로 할퀴어 생채기를 내는 대신 상처난 자존심을 어루만지고 쓰다듬어 새살이 돋게 하는 생산적일에 다시 모험을 하고 싶습니다. 덤핑하는 그대들에게 돌팔매를 던지는 대신 적어도 밥벌이 걱정은 하지않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일에 힘을 쏟고 싶습니다. 그 일이 돌멩이 하나 쌓는 일이라도 그리하고 싶습니다.
일하는 터전은 지방의 소도시이지만 생각의 틀까지 이 도시에 가두고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제주 올레길을 걸으며 들었던 하얀벽 뒤의 구럼비 구럼비 울음소리에 귀기울이며, 북송될 탈북민들의 공포에 대해서도 함께 느끼며 아파하고 싶습니다. 건축을, 저의 터전인 이 도시를 갇힌 틀이 아니라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단으로 삼아 자유롭고 싶습니다. 답은 제 안에 있습니다. 스스로를 냉정하게 돌아보고 현실을 핑계대지 않고 직시해야 할 겁니다. 앞으로의 10년이 지난 10년에 고스란히 포개지지 않으려면 늘어진 몸을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눈에 힘을 주고 이젠 웃어 볼랍니다. 더한 날들도 버텨온 제가 아니던가요? 그래요. 그게 저였어요, 그게 저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