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의 미학
통도사 대웅전에는 불단위에 불상이 없고 방석만 놓여있다.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기 때문에 따로 불상을 놓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텅 빈 불단은 무언가를 생각하게 해주며 묘한 종교적 감동을 준다. 절이 사라지고 자취만 남은 폐허, 즉 오래된 절의 옛터도 우리에게 그런 감동을 준다. 그것은 공간에 무척 깊은 시간과 기억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곳에 가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경주 한복판 너른 들에 초연하게 앉아있는 황룡사 절터, 강원도 양양 산속에 깊이 숨어있는 진전사 절터, 여주 고달사 절터…. 나는 그 자리에 앉아서 햇볕을 쬐는 것을 좋아한다.
몇 년 전 오랜만에 만난 선배와 점심식사를 하다가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답사여행으로 주제가 흘러갔다. 서로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역시 답사의 꽃은 폐사지가 최고라고 입을 모으며 “어디까지 가봤니”하는 식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고건축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선배가 “내가 가본 절 터 중에는 합천 대동사(大同寺)절터가 참 좋았어, 거길 한번 가봐야 해, 아∼ 그 분위기!” 하며 진정으로 아련해지는 눈을 해가며 내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런데 그 곳은 불행히도 내가 가보지 못했던 곳이었다. 그렇게 그날의 시시한 힘겨루기는 나의 완패로 싱겁게 끝나고 말았는데 내가 못 가본 그 절터의 정체가 여간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서울에 매어있어서 답사는 서울 인근에 있는 광탄 보광사도 못가는 형편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컴퓨터로 대동사 절터를 검색했다. 누군가 굉장히 좋은 카메라로 정밀하고도 침착하게 찍은 사진이 컴퓨터 화면에 떴다. 초가을 무렵인지 희미하게 남아있는 여름의 초록위로 갈색이 서서히 밀려오는 어느 새벽에 찍은 사진으로 보였다. 아무것도 없고 그냥 등신불 크기의 불상만 눈에 들어왔고 “이곳은 사람들이 잘 모른다. 아! 참 좋다” 대충 그런 말이 적혀있었다. 사진을 올린 사람도 선배와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다지 바쁘지도 않으면서 답사를 갈 시간을 낼 수 없는 나날이 그 후로도 한 몇 년 지속되었다. -도대체 왜 세상은 가난뱅이들에게서 시간마저 빼앗는 걸까.―
그러다가 드디어 그 곳에 갈 기회가 왔다. 합천 바로 옆 동네인 의령에 일이 생겨 가게 된 것이다. 대전 통영 간 고속도로를 타고 무주, 함양, 산청을 지나 덕산 인터체인지로 들어갔다. 멀찍이 언제보아도 코끝이 찡해지는 감동적인 산, 지리산이 쿵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커다랗게 앉아있었다. 지리산을 뒤로하며 그 길로 생미량, 대의를 지나 의령의 옆구리를 스치고 삼가를 지나 고개를 몇 개 넘어서 아주 한적한 마을로 접어들었다. 논과 밭 사이의 좁은 마을길로 한참을 더 들어가니 멀리 저수지 언저리에 돌부처와 석등이 보였다. 거기가 그 좋다던 대동사 절터였다. 마치 전설의 문이 열리는 듯한 감동이 밀려왔다. 가까이 다가서서 보니 표정이 다 없어지고 몸짓이 다 지워진, 항마촉지인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크기만한 석가모니불이 있었다. 그 옆에 또렷한 표정으로 단정하고 야무지게 서 있는 석등과, 무척 굵고 구부정한 느티나무가 횡으로 나란히 서있었다. 그 뿐이었다. 절 자리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었고 그냥 여기 저기 흩어져있던 돌덩어리들을 맞춰서 한 구석에 나란히 모아놓은 듯 했다. 아니면 누군가가 어느 예전에 느티나무에게 맡기고 출타한 듯했다. 과거의 어느 시절에는 저기 앉아있는 부처님이 잘 지어놓은 대웅전에 앉아서 허공을 배경으로 좌우에 산을 거느리고 앉아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사람들은 이 자리로 곧바로 머리를 조아리며 들어가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졌다. 저 느티나무는 이 절이 들어설 무렵 심어놓은 느티나무일 것이고, 나이를 합치면 삼천 살이 되는 세 친구가 나란히 양광을 모으며 앉거니 서거니 하고 있는 것이리라. 나는 그런 모습을 보았다. 영원같이 길고 긴 천 년의 시간과 천 년을 비추는 빛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