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뜰리에 운영기

2010-12-16     오영욱 ogisadesign d'espacio arch

이제 딱 삼 년이 흘렀다. 삼 년 전 나는 세무서 건물 앞에서 마구 두근거리고 있었다. 난생 처음 받아보는 사업자등록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세자영업자’. 그게 스스로 내게 붙인 직함이었고 당시 나의 직업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병역특례로 건설회사에 다닌 다음, 4년간의 해외생활을 마치고 바로 귀국한 설계 초년병의 선택은 우아한 건축사무소가 아닌, 작업실 개념의 작은 아뜰리에의 개소였다. 4년을 외국에서 떠돌며 내린 결정이었다. 자유와 성취. 이 두 마리 토끼를 잡자.

나의 결정은 어엿한 설계사무소를 운영하는 건축사분들이 볼 땐 무모한 도전일 수도 있었다. 적어도 건축설계 분야에서 나는 아무런 토대가 없었다. 세상의 그 어느 건축주도 작고 허름한 작업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설계해주세요’ 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지난 몇 해 동안 여행기를 출간하고, 건축적인 일러스트 작업을 했던 기반에 조금 몸을 기대기로 했다. 덕분에 비록 외국에 나가있었어도 이런저런 사람들을 많이 알고 지내고 있었다.

일단 소개를 받고 인테리어 일을 시작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작은 인테리어 일이란 도면 작성으로 끝나는 일은 아니다. 시공까지 맡게 되어 목수 반장님과 금속 사장님과 설비회사와 옥신각신하며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갔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문득 일이 들어왔다. 4층짜리 작은 근린생활시설의 기본설계 건이었다. 소개받은 어느 건축사사무소와 협업 관계를 유지하며 나는 이 작은 건물에 도시 맥락적인 이야기와 시간의 이야기를 담는 작업을 진행했다. 건물에 이야기를 담는 작업을 건축주와 수없는 대화를 하며 몇 달을 보냈다. 그리고는 진행 취소. 건축주는 더 이상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는 초짜에게 이 일을 맡길 수 없다고 판단했고 나는 다시 인테리어 현장으로 돌아가게 됐다.

1년 반이 지났을 때 인테리어 작업이 외국에 팔리는 잡지에도 나가게 되고, 외국에 지어지는 건물의 기본 설계 작업을 하기도 했다.(역시 아직 지어지진 않았다.)

맨땅에 헤딩한다는 게 그 시절 내 처지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었던 것 같다. 그렇더라도 조금 더 잘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겁 없이 영세자영업자의 길을 버리고 작은 사무실의 모양새를 갖추기로 했다.

그 때 같이 지내던 직원은 한 명이었는데, 건축 전공자는 아니었다. 일단 공감대를 형성하며 ‘나의’ 작업이 아닌 ‘우리의’ 작업을 할 사람이 필요했다. 건축사인 절친한 대학동기와 손을 잡았고, 인테리어 전공자와 설계 경력자를 한 명 한 명 늘여갔다.

 

지금도 여전히 작은 일들을 하고 지낸다. 무모하게 아뜰리에를 차리겠다고 스스로 선언했을 때부터 항상 하던 다짐은 ‘재미를 잃지 말자’다. 어디 잡지에 뽐내며 실을만한 작업을 하고 있진 못하지만 하나하나 최선을 다하고 있다. 다행히 아직 즐거운 편이고, 지금까지 진행했던 작업을 누구에게 내보일 때 적어도 창피하지는 않다.

신축 주택의 기초가 시공되고, 리노베이션 현장에 비계가 세워지던 지난 늦가을. 첫 신축 건물의 완공이 있었다. 특이하게도 우리의 첫 작업은 서울 북촌에 들어선 한옥이었다. 한옥에 대해 처음부터 공부해야 했고, 수많은 민원인들에게 고개를 조아려야 했고, 종로구청을 사무실 드나들 듯 했던 힘들었던 기억은 건축주의 집들이에 초대를 받고 종이 위에 그려진 선들이 실제의 재료로 구현된 공간 속에서 웃고 떠들면서 모두 사라져갔다. 이것이 아마 15년 전 건축과에 입학하게 되며 바라던 길이 아니었나 싶다.

대한건축사협회와는 ‘서울국제건축영화제’의 포스터 일을 맡게 되면서 처음 관계를 맺게 되었다. 작업 비용을 떠나 대한건축사협회와 일을 같이 한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기분이었다. 몇 가지의 시안이 나온 끝에 최종적으로 결정된 포스터는 지금까지의 설계 작업이 그랬듯이 아쉬움도 있고, 한편으로 뿌듯함도 컸다.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축을 위해 무언가 힘을 보탤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가장 기뻤다.

시대가 변하며 아뜰리에의 운영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나는 처음부터 힘들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냥 버틸 만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동반자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힘들어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건 내 또래의 비슷한 사람들이 때로는 경쟁하면서 각자 열심히 도전해보는 것일 테다. 지금 나와 비슷한 입장에 있는 한국의 건축인들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수준이다.

포스터 작업을 맡겨주신 고마운 대한건축사협회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젊은 건축인들이 보다 용감하게 꿈을 펼쳐나갈 수 있도록 작은 격려의 손길을 내밀어줬으면 좋겠다. 바로 지금을 위해서가 아니라 50년 후, 100년 후의 우리 건축계를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