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속에 하나 되는 시기
'삶과 일터사이'라는 주제로 원고청탁을 받고 며칠동안 삶이란 무엇이고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곰곰하게 생각하며 보냈다. 글쎄... 여전히 삶이란 무엇인지 몰라도 내게 주어진 일은 씩씩하게 하고 이왕이면 즐겁게 하면서 살아왔는데, 어느새 삶의 복잡하고 다양함속에 놓여진 한 사람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아침 일찍 설계실에 도착해서 커피한잔 마시고 시작한 하루가 도면작업 끝내고 저녁에 비누로 손을 씻을 때의 그 좋은 기분 때문에 제대로 된 하루로 마감됐다고 느껴졌을 만큼 옛날의 연필과 지우개로 도면작업할 때 생각하면, 지금도 기분 좋아진다.
기본적인 구상이 끝나고 T자와 삼각자로 힘주어 도면작업을 하고나면, 정말 기분좋은 내자신의 일에 긍지와 자부심이 느껴지곤 했었다. 사회통념적인 직업에 대한 것들이 무엇이 중요했겠는가. 내가 지금 하고있는 일이 나에게 자부심을 주고 그 일이 즐겁다면 그것이 행복이었다.
3D기법으로 표현되면서 바로 화면에 여러 각도로 보여줄 수 있는 컴퓨터는 멋진 디자인을 위한 도구이긴 하지만 생각의 영역이 완전히 달라졌다. 여전히 건축은 여러사 람의 생각과 땀이 모아져야 마무리되는 작업이지만 모든 건축설계분야의 빠른 변화속도에 많이 겁이 난다. 이제는 일 핑계로 여기 저기 돌아다니고 심의하고 심의 받으며, 각종 회의에 묻혀 지낼 때가 많다보니, 손으로 작업하는 것보다 입으로 작업하는 일이 더 많아졌고 건축외적인 인간관계로 신경 쓰는 일이 더 많아졌다. 어차피 모두 해야 할 일련의 과정들을 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왜 옛날처럼 신나고 즐겁지 않은지....
며칠전 지인을 통해서 중학생의 숙제 중에 나중에 자신이 되고 싶은 직업의 전문가와 인터뷰하는 숙제가 있다고 해서 한 학생의 질문리스트를 받았다.
당신은 이 직업에서 만족을 느끼는가?
당신은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통해서 충분한 수입을 받고 있는가?
당신은 다시 시작해도 이 직업을 선택하겠는가?
당신은 당신이 하고 있는 직업을 후배에게 자신있게 권할 수 있는가?”.....
난 무슨 대답을 할지 망설이며 대답을 해야 했다. 많은 질문 중에 여전히 다시해도 이 직업을 선택하고 싶다에 빠른 반응을 보이는 내 자신을 보면서 바보든지 환자든지 둘 중 하나일거라며 웃었다. 이유 없이 그냥 좋았던 순수했던 마음이 많은 일로 상처받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일을 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무슨 위안을 줄 수 있을까?
이제까지 해왔던 일들이 즐겁고 감사했다면, 지금부터 해야 할 일들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할지가 고민이다. 요즘 문화복지센타 설계협의 하느라 영월에 자주 가고 있다. 전혀 가보지 않았던 새로운 장소에 적응하고 그곳에 새로운 매력을 찾아가는 재미 또한 덤으로 얻는 건축작업의 결과다. 자연과 많이 닮아있는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용하게 될 그 장소에 우리의 정성이 담겨지길 바라면서 우리사무실직원들은 애쓰며 작업하고 있다. 이런 작업을 통해서 여러 도시에 우리가 설계한 건축물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또 현상설계에 도전하고 밤샘 작업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나는 사람마다 힘들어지는 경제를 얘기하며 답없는 대화를 하고 있다. 내가 아무리 좋아했어도 건축도구들마저 변화되어 생소감을 주는 것처럼 우리 건축설계분야는 앞으로 더 많은 것들이 변화될 것이다
삶중에 가장 맛없는 초코렛을 먹는 타이밍도 있고 가장 맛있는 초코렛을 먹는 타이밍도 골고루 들어있다고 하는데, 생각해보면 건축 작업을 통해서 그 어떤 분야보다 달콤하고 맛있는 초코렛을 먹었던 것 같다.
신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우리에게 주어진 적이 언제는 있었는가? 설계수주 문제나 건축기본법등 산적한 건축계의 모든 문제를 제쳐두고도 과연 나는 이 일을 통해서 달콤한 초코렛을 맛본 기억이 있었다면, 우리 모두 다시 그 기분부터 살려냈으면 좋겠다. 때맞춰서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건축계의 마음이 하나로 뭉치는 이 시기에 건축사로써 각자의 잃어버린 자부심도 함께 되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