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등에 내리는 눈
2017-08-16 함성호 시인
발등에 내리는 눈
- 박연준
당신이 꽃을 주시는데
테이블에 던져놓고 잊어버린 밤
사라진 것은 밤이 아니라
빛의 다른 이름이다
일회용 컵 뚜껑을 깨물다
입술을 베인다
가벼운 것에 베이면 상처가 숨는다
틈으로 들어오는 것이 빛인지 어둠인지
허공을 더듬는 거미의 열기인지
허방, 이라는 계단인지
눈밭에서 참았던 오줌을 누며 생각한다
지금,
어딘가에서 젖니들은
여전히 지붕 위를 날고 있을 것이다
발등에 내리는 눈처럼 흩날릴 것이다
정정당당하게 사라진 얼굴들
눈밭에 풀어 놓으니
녹는다
까놓은 엉덩이로 별이 떨어지면
별의 자식을 수태할 것 같다
이제 어떤 키스가
내 입술을 벨 수 있을까?
-『베누스 푸디카』 박연준 시집 / 창비 / 2017
첫 줄이 시의 전체를 만드는 경우가 있다. 한 문장이 다른 문장을 낳고, 그 문장이 또 다른 문장을 낳는다. 문득 떠오른 생각도 그렇다.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계속된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썼던 자동기술법(automatisme)과 다르다. 의식의 흐름을 쫓는 심리적인 기법과도 다르다. 단순한 연상들이 다른 연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꽃-밤-이름, 그리고 입술을 베이고 상처가 숨고, 허공과 허방이, 눈밭과 젖니가, 별과 키스가 아무 상관 없는 듯이 이어지지만 색과 촉감, 청각과, 맛, 냄새에서 모두 뜻이 통한다. 오감을 만족시키는 시다.
<함성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