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마을 모래톱

2010-09-01     장양순 건축사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산악이 대부분인 우리나라는 국토의 효용성과 가용면적에서는 뒷전에 앉을 수밖에 없지만, 국민가요가 된 김소월의 시와 같이 산자수명하여, 동네마다 명산대천은 아니더라도 냇가가 하나씩은 흐르게 마련이고 그 곳에는 어김없이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다.

초등학교의 여름방학, 조기회장의 호루라기 소리에 새벽부터 보건체조와 씨름, 기마전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곳이 동네 모래톱이었다. 한낮에는 미역 감고 야구나 배구를 하였고, 커서는 천렵장소로도 안성맞춤이었다. 그런가하면 TV는 물론 영화관조차 제대로 없었던 60년대에는 추석을 맞아 동네청년들이 만든 연극의 공연장소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모래판을 뜀박질하다보면 누군가 참외 수박 서리하여 묻어 놓은 것들이 들어나, 때 아닌 포식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근대화는 건설용 모래의 수요를 급증시켰고, 한 삽 두 삽 인건비나 받으며 파내려간 백사장은 그 형태조차 없어지고, 자정 기능을 잃은 강바닥은 개흙이 쌓여 지금은 수영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나를 성장 시켜준 동네 모래톱과 달리 해공 신익희선생의 대통령후보 유세 때 30만 명이 운집하는 등 정치의 장으로, 국군의 날엔 공군의 에어 쇼 장소로 그리고 한 여름철엔 강수욕장으로 그 성가를 높였던 한강의 모래톱은 한강인도교, 압구정동, 뚝섬, 워커힐 등 곳곳에 산재하여 서울시민과 애환을 함께한 휴식처였다. 그러나 이곳 또한 개발논리에 밀려, 높게 쌓은 둑은 모래 팔아 자동차전용도로를 만들고 둔치에는 운동시설이 들어섰다. 또한 둑 안으로 편입된 백사장에는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도 많은 개발이었다. 당시의 시대상황은 자연보다는 개발이 우선이었기에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필자는 안동시 풍산읍 청성산 중턱에 학봉 김성일 선생이 지은 석문정에서 내려다 본 낙동강의 금빛 모래톱과, 부용대의 절경에 올라 본 하회의 광활한 백사장의 아름다움을 잊을 수 없다. 하회마을이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기 전 4대강 사업의 하회보는 취소되었으나, 지정 후 구담보와 영주댐을 문제 삼는 환경론자들이 생겼다. 전문지식이 없어 모르긴 하나, 시골까지도 모래톱을 보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된 마당에 이들만이라도 온전하게 보존되어야 한다.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징비록이 있는 하회마을이다. 시행자들은 서애선생의 책이름을 되새겨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