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 땀 흘리는 여름

2010-09-01     문철수 건축사

아직도 다 물러 가지는 않았지만, 올여름은 더위 자체 보다는 끈질김이 압권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 핑계로 비교적 오랫동안 맘 편히 잘 놀았다.

그뿐 아니라, 8월 내내 부동산과 건설 시장 침체 뉴스가 보도되는 탓에 겉으론 심각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여유있게 휴가 기간을 즐길 수 있었다. 어차피 일없는 터에 더위와 불경기는 집사람 눈총을 따돌리기에 충분했고, 느긋한 장기 휴가의 기가 막힌 변명거리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뉴스에 보도되는 경기상황과 지방 소규모 설계사무소의 운영에 의미 있는 상관관계가 없어진지는 이미 오래된 일이 아니었던가?

지방 중소도시의 구도심속 전체 약100평의 대지에 분할 없이 지분으로만 등기된 30평 되는 짜투리 땅에 2층 건물이 있었다. 그중 한 건물이 낡아 순전히 내 조언으로 덜컥 철거를 하고보니 현행법상으로는 대지분할이 불가능하여, 하는 수 없이 동일 지번에 있는 다른 두 건물을 매입하여야 할 처지가 되었다. 쏟아지는 건축주의 원망을 애써 여유롭게 받아 넘겼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잘됐으니 걱정을 마시라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뭔가 켕기는 기분이 드는 것은 피할 수 없어, 그때부터 사업성 검토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상업지역이니 한 층에 몇 평, 도로사선 감안하여 대충 몇 층에 총 몇 평 하는 식의 주먹구구를 했고, 최소 공사비와 여러 가지 방법의 투자금 회수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손에, 등에, 이마에 서늘한 진땀이 흘렀다.

한 나절 이상을 소비하여 엉성하게나마 개략 내역서를 완성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담겨 있었다. 그 작은 대지 하나를 요리하는데 드는 전체 비용이 아무리 용을 써도 간단히 10억을 넘기지 않는가? 그 위대한 돈의 가치, 설계비는 아예 넣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이마에 진땀이 더 흘러 내렸다. 그런 돈이 어디 있담..

딱하게만 여겼던 여러 공사 업자들이 생각났다. 그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고 나갔을까.

세상의 모든 사실은 절대적으로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만의 창을 만들어 그 창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아왔고, 다른 각도의 장면은 ‘지혜’라는 이름을 가진 신의 축복 없이는 절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수십 년간 그토록 믿어왔던 하나밖에 없었던 창이 삐걱 거리고 있었다.

장고(長考) 끝에, 모든 책임을 지고 밀고 나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철거에 관한 판단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고, 어떤 상황에서든 설계 여하에 따라 건축물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라 했던 말이 맞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내 마음 속에 건축을 보는 새로운 창이 하나 만들어 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왜 여태 한 번도 직접 시도해 보지 않았을까?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모든 장면의 뒷면이 얼핏 보이는 듯하다.

그렇게 애를 쓰고도 성취하지 못했던 사업적 안정에 대한 숨은 이유, 분명히 불합리한데도 건축사보다 건설업자들의 의견이 더 많이 선택받는 이유..

올 여름 분에 넘치게 가졌던 장기간의 휴가는 등에 식은땀을 흘리게 만드는 서늘함마저 안겨주며 끝나가고 있다.

사족(蛇足)으로, 내 고약한 조언으로 멀쩡한(?) 건물 철거당하고선, 그 잘난 건축사 어디 어떻게 하나 도끼눈 뜨고 지켜보고 있는 건축주는 팔순이 넘은 내 어머니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