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통건축의장 서설⑳ - 서양의 투시도법을 받아들이면, 우리의 건축공간도 원근법으로 구축한다<수원 용주사>

2010-06-01     김홍식
▲ 김명국의 달마도

인조 때 화가 김명국은 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두 번이나 갔다 온 유일한 사람이다. 그의 달마도는 유명한데 일본 사람들이 그의 독특한 화법을 좋아해서 어찌나 청탁을 하던지, 여관에서 잠을 잘 틈이 없을 정도였다. 소문을 들은 임금은 자신의 딸을 위해 그림을 그려 달라며 빗을 하나 주었다. 가당치도 않은 탁이지만 임금의 명령이니 무슨 그림을 그려 주었다. 임금 이하 선물을 받은 공주도 그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공주가 머리를 빗다 보면 빗에 머릿니가 붙어 있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빗에 그려진 그림이었다. 화가 난 임금이 김명국을 불러 질타를 했지만, 명국은 자신의 그림 그리는 도법을 시험해 본 것이다. 정면이 아니고 옆으로 비껴보면 사물이 바르게 인식되는 투시도법의 변형을 이미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시험작은 서양의 화가들에서도 자주 본다.

정조 때가 되면, 서양의 오피러스(초상화 그릴 때 피사체를 거꾸로 투영시키는 카메라와 유사한 기구)를 이용해 초상화를 그리게 되고 이전보다 훨씬 정교한 투시도법을 활용한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이 수원 용주사 대웅전 후불탱화이다.

▲ 용주사 대웅전 후불탱화(문화재청)
▲ 용주사 대웅전 후불탱화(부처님 그림 확대)

여기의 부처님은 마치 르네상스 시대의 성화처럼 콧등이 올라가는 등, 입체적이어서 마치 서양화를 보는 듯하다. 이 그림은 명지대 이태호 교수가 하도 선전을 해 대서 사진촬영 금지령이 엄격하기로 유명한 그림이다. 나도 대웅전 밖에서 사진을 찍으면서도 몇 번의 주의를 받았다.

그렇다면 동시대에 지어진 용주사 평면 배치는 어떤가?

당시의 지식인 선비들은 그림과 시를 같이 감상했고 이들이 감당(감독관)이 되어 기능공인 장인을 끌고 새로운 미학을 실천해 나갔다. 우선 용주사는 철저한 좌우대칭으로 배치된다. 마당은 세로축으로 긴 고전적 방식이 아니고 약간은 좌우가 넓은 바른네모꼴이다. 이것이 일점투시의 요체이다. 양쪽의

▲ 용주사 평면 배치

‘ㅁ’자 요사 채에는 마당 쪽으로 툇마루를 두고 열주를 세워 죽 배치한다. 일점 투시도법에 따른 공간을 계획할 때 쓰는 방식으로, 거리감을 주기 위해서이다. 입구는 3간의 누마루 밑창을 통과시키는데 높이가 반반으로 적절해서 마루 아래로 가로가 긴 공간이 펼쳐지며 딱 중앙에 대웅전의 부처님과 뒷벽의 탱화가 겹쳐진다.

양쪽의 툇마루는 대웅전까지 연결되지 않고 사이를 공간으로 비워두고 있어서 대웅전이 누마루 앞으로 가득차서 다가선다.

 

▲ 용주사 누마루 아랫공간

여기 세로축 공간감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강남의 봉은사나(지금은 없다) 양양의 월정사처럼(발굴에 따라 새로 복원했다) 내삼문 앞으로 누다락 집을 세로로 배치할 수도 있는데, 여기서는 주간이 넓은 3간 누마루를 가로로 배치해서, 마치 최후의 만찬 그림처럼 가로로 긴 일점투시 화면을 연출한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 투시도법

열려진 틈새로는 동쪽에 가로로 긴 공간을, 서쪽에 세로로 긴 공간을 마련하고 주된 건물을 그 네모 공간의 바깥쪽 구석으로 배치하여 마당에서 볼 때의 중심성을 강조한다.

▲ 용주사 마당공간

내삼문 앞으로는 당연히 외삼문을 설정해야 할 텐데, 지금 있는 사천왕문은 최근에 신축한 것으로 주기론자의 미학에 따라 축을 일부러 비뚤어 두었다. 원래 길이 절 앞을 바로 지나가지 않을 때는 저 멀리 일주문이나 혹은 홍살문 정도를 둬서 기승전결의 도입부 암시를 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