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근법

-이민하

2016-03-16     함성호 시인

검은 우산들이 노란 장화를
앞지르고 있었다
차도에는 강물이 흐르고
건너편에는 머리가 지워진 사람과
발목이 잘린 아이들이 떠내려간다
오후에 떠난 사람과
저녁에 떠난 사람이 똑같이
이르지 못한 새벽처럼
한 점을 향해 가는
길고 긴 어둠의 외곽 너머
텅 빈 복도에 서서
눈먼 노인과
죽어가는 아이가 함께 내려다보는
마르지 않는 야경 속으로
몇 방울의 별이 떨어졌다

-『세상의 모든 비밀』이민하 시집 중에서 /문학과 지성사 / 2015

원근법은 있는 그대로의 공간을 보다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기 보다는, 공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편이 훨씬 정확한 얘기 일 것이다. 우리의 시각은 원근법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의 뇌는 지금 보고 있는 것 이외의 기억들을 종합해서 공간을 재구성하는 버릇이 있다. 피카소의 입체주의는 장난이었고, 서유럽 미술사의 치기였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어린애의 그림에도 놀라움이 있듯이 그의 그림은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아 있다. 차라리 달리가 원근법에 더 치열하게 매달렸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