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칼럼] 대한건축사협회가 설계공모를 주관하는, 비현실적이지만 아주 상식적인 상상
요즘 가장 ‘핫’한 국중박(국립중앙박물관)은 사실 우리나라 최초로 국제건축사연맹(UIA, Union Internationales des Architectes)의 공인 국제설계공모로 이루어졌다. 1994년경 정부는 당시 용산에 박물관 부지를 확정 후, 설계공모의 공정성을 보장하기 국제건축사연맹에 공모 운영을 의뢰하였고, 연맹은 빌헬름 퀵커(심사위원장)와 앙리 시리아니 등 감독관 4명을 심사위원으로 위촉하였다.
당시 학생이었던 필자는 조선총독부를 철거했음에도 혹시 일본의 건축사가 당선될까 걱정(?) 하기도 했지만, 영광스럽게도 한국 건축사가 당선되어 지금의 자랑스러운 ‘국중박’이 탄생하였다. 30년이 지난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지금의 시점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정부가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서 국제건축사연맹이 국제설계공모를 주관하였다는 것이다. 비유하면, 대한건축사협회가 공공건축물 설계공모를 주관한 것과 유사하다.
몇 년 전부터 부산시도 ‘프로젝트 서울’과 유사한 설계공모 시스템을 운영하고, 서울시교육청과 경기도교육청도 자체 설계공모시스템을 운영한다. 건축사들도 해당 기관의 공모시스템에 적응(?)하고 참여하고 있다. 최근에는 어느 민간업체가 지방 시·군 단위 자치단체의 의뢰를 받아 공모를 대행하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해당 민간업체의 공모진행과 질의응답 절차에 있어 미숙함이 보였고, 심사과정에서 보안사항이 일부 노출된 적도 있었다.
공공프로젝트임에도 건축사가 관련 전문성이 부족한 민간업체에게 종속되는 것 같아 못내 씁쓸하였다. 추측건대, 해당 지자체가 공모 발주의 경험이 부족한 탓에 혹시 발생할 수 있는 공정성 시비를 피하고자 공모운영(권)을 민간업체에게 의뢰한 것이다. 지자체와 공무원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이것도 일종의 공공업무에 있어 ‘위험의 외주화’이며, 공공기관의 직무유기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공공기관의 공모시스템구축과 민간업체가 공공기관의 설계공모를 주관하는 상황, 이 모든 근본적인 이러한 원인은 결국 건축사 스스로가 ‘공정성’을 잃은 결과이다. 건축사의 공신력은 수익창출을 목표로 하는 민간기업만큼도 안 되는 것인지 자괴감이 생긴다.
의료행위는 의사만이 할 수 있듯이, 법적으로 건축사만이 건축설계를 할 수 있다. 그래서 원초적인 의구심과 함께 순진한 상상을 해본다. 앞서 말한 ‘국중박’의 사례처럼, 대한건축사협회가 설계공모를 주관할 수는 없을까? 이 상상에 대한 우려와 비판은 당연하다. 건축사가 핵심 이해당사자이며, 게다가 작금의 설계공모에서 벌어지는 건축사들의 불공정 행태(!)를 고려한다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고 ‘어림없는 소리’라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협회가 설계공모를 주관하고 관리·감독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협회의 권리이고 의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건축사만이 건축설계를 할 수 있고 건축사만이 가장 좋은 계획안을 판단할 수 있기에, 오히려 가장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방식이다. 교수나 건설 분야의 종사자는 해당 분야에 대해 조언은 가능하지만, 계획안에 대한 종합적인 가치판단은 건축사만이 할 수 있다. 건축사들이 우수한 계획안과 해당 역량을 지닌 건축사를 ‘공정’하게만 선정한다면, 이보다 나은 방법이 있을 수 없다.
역설적으로 건축사협회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설계공모 과정의 폐단과 허점을 제일 잘 알고 있는 조직이고 단체이다. 그래서 ‘공정성’만 담보할 수 있다면, 설계공모에 관해서는 가장 전문성을 보유한 단체 또한 건축사협회이다. 그러나 매번, 항상, ‘공정성’이 문제이고 결론이다. 결국 공정성을 담보했을 때만이, 필자의 상상이 실현 가능해진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공공기관별로 발주 경험을 바탕으로 독립된 공모시스템을 개발하였지만, 영악한 건축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공모방식의 허점을 찾아서 부정한 스킬을 익히고, 심지어 우호적인 심사위원 명단을 확보·관리하는 이너써클을 구축하는 실정이다. 건축사의 불공정한 행위의 폐해는 건축사협회가 가져야 할 공신력을 훼손하고 손상시키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협회는 적극적인 개입과 강력한 대응을 해야 한다.
얼마 전, 대한건축사협회가 시행한 공정한 심사를 위한 ‘심사위원 사전접촉 금지 캠페인’도 의미가 있었지만, 필자가 판단하기엔 더 강력한 규범이 필요해 보인다. 현재의 수동적인 징계 결정과 수준으로는 강제성이 약하다. ‘의무가입’이 시행됨에 따라, 대한건축사협회의 공신력은 과거 직능단체 시절보다 더 확장될 수 있는 법적 근거와 윤리적 명분을 얻었다. 이를 동력으로 기존의 상벌기준과 별도로, 설계공모 불공정에 대한 강한 징계기준을 수립하고 강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협회가 규범을 강화하고 강제화한다고 필자가 상상이 현실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비현실적’이고 그 결과가 소원한 것이라고 포기하거나 민간기관에 그 권한을 양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복마전 같은 공모판을 더 이상 고착화할 수 없다. 최근 K-한류에 힘입어, 마치 주입하듯 K-건축을 육성하려고 하지만, 그 핵심은 ‘공정성’에 있다. 대한건축사협회는 우리 협회의 공신력과 공정성을 실추시키는 불공정한 회원에 대해 강력하게 대응하길 바란다. 회원의 보호라는 명목으로 불공정 회원에게 엄격하지 못하면, 불공정한 현실을 방임·방조하는 것이며 그나마 ‘양심’을 지키려는 회원들을 오히려 유기하는 것이다.
혁신과 개혁의 차이는 변화의 동력이 내부에 있느냐, 외부에 있느냐의 차이다. 의무가입이라는 법적 근거가 협회의 공신력을 회복하고 조금이라도 ‘공정성’에 다가갈 수 있는 지렛대가 되도록 활용하기를 기대한다. 어쩌면 이번 계기가 대한건축사협회 스스로 혁신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