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답사 수첩] 고산 윤선도의 풍류가 담긴 보길도 세연정(洗然亭)

2025-11-25     김진섭 건축사 · 건축사사무소 라온

세연정(洗然亭)은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 부황리, 일명 ‘보길도’라 불리는 섬에 있는 정자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문인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조성한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세연정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추구한 조선시대 정원의 정수를 보여주는 공간으로, 한국의 전통 조경미와 선비정신이 어우러진 문화유산으로 평가된다. 이곳은 1979년 국가 명승 제34호 ‘보길도 윤선도 원림’으로 지정되었으며, 우리나라 3대 정원 중 하나로 꼽힌다. ‘세연(洗然)’이라는 이름에는 ‘마음을 깨끗이 씻어 맑게 한다’라는 뜻이 담겨 있어, 윤선도의 심성을 드러낸다.

어부사시사를 노래하던 세연정. (사진=김진섭 건축사)

세연정의 조성 배경과 경관
윤선도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학자로, 특히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와 같은 가사 문학을 통해 한국 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현실 정치의 부패와 혼란에 실망하여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으며, 보길도에 들어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추구했다.

그가 세연정을 비롯해 낙서재(樂書齋), 동천석실(洞天石室), 부용동(芙蓉洞) 등을 설계하고 조성한 것은 단순한 은거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도(道)를 찾고자 하는 유가적 이상’의 실천이었다.

윤선도는 보길도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으면서 그 속에 인간의 삶이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정원을 설계하였다. 그는 인공적인 장식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암석, 물길, 숲을 활용하여 정원의 생명력을 유지했고, 이를 통해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을 구현하였다.

세연정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별서정원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 정원의 핵심은 정자, 연못, 폭포, 암석, 식생의 조화이다. 세연정의 입구에 들어서면 부용동 계곡이 펼쳐지고, 그 중심부에 세연정이 자리한다. 계곡 위쪽에는 작은 폭포가 흐르고, 그 물이 자연스럽게 연못을 이루며 흘러내린다. 이 물길의 흐름은 ‘자연스러움’과 ‘생명력’을 상징한다.

정자 ‘세연정’은 돌기둥 위에 지어진 팔작지붕의 건물로, 비교적 소박하고 단아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인공적으로 화려함보다는 주변 경관과 어울리는 조형미가 돋보인다. 정자 앞에는 넓은 연못이 있으며, 그 가운데에는 작은 섬이 떠 있고, 섬 위에는 소나무가 자라 자연의 운치를 더한다. 이 연못은 ‘연못 속의 섬, 섬 속의 나무’라는 삼중 구조를 이루어,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상징적 공간을 완성한다.

또한 세연정 주변에는 ‘낙서재(樂書齋)’와 ‘동천석실(洞天石室)’ 등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으며, 이들은 각각 학문과 사색, 그리고 휴식의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정원 전체가 하나의 철학적 세계관을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공간 구성은 마치 한 폭의 산수화처럼 조화롭고, 인간의 손길이 자연 일부로 스며든 듯한 미감을 자아낸다.

보길도 세연정 판석보. (사진=김진섭 건축사)

세연정의 문화적 가치와 예술성
윤선도는 세연정에서 자연을 관조하며 무심(無心)의 경지를 노래했다. 그는 자연을 지배하거나 개조하는 대신, 자연 속에서 자신을 비우고 순응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정신은 동양의 선(禪) 사상과도 깊이 맞닿아 있으며, 조선 유가의 이상적 인간상인 군자(君子)의 삶을 상징한다.

미적으로 보았을 때 세연정은 자연미, 절제미, 균형미가 뛰어난 공간이다. 특히 물과 바위, 수목의 배치가 조화로워 정적이면서도 생동감이 있으며, 인공적인 구도 속에서도 자연의 흐름이 살아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세연정은 단순한 정원이 아니라, 한국 조경미의 완성형이라 할 수 있다.

세연정은 한국의 정원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사례로 활용되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존중하는 세연정의 철학은 현대 환경문제와 지속가능성의 관점에서도 큰 시사점을 준다. 인공과 개발 중심의 현대 도시 환경 속에서, 세연정은 ‘자연 속의 인간’이라는 본래의 삶의 가치를 일깨우는 공간으로써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세연정의 맑은 물과 조용한 풍광 속에는 윤선도의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메시지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주소 : 전남 완도군 보길면 부황길 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