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AI 시대, ‘판단을 검증하는’ 건축사로 진화해야
최근 몇 년 사이, 건축 설계의 무대가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다. 예전에는 설계 전문가만이 다룰 수 있던 프로그램과 도면이 이제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플랫폼 형태로 바뀌었다. 클라우드 기반의 설계도구, AI 형상 생성기, 자동 용적률 계산 시스템 등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진보가 아니다. 설계 정보의 개방과 공유라는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한다.
AI 설계 플랫폼은 이미 건축 데이터를 학습해 ‘합리적인’ 형태를 제안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예를 들어, 몇몇 프로그램은 AI를 기반으로 대지의 형태, 일조, 조망, 소음, 바람 데이터를 입력하면 최적의 건축 배치를 자동으로 제시한다. 또 다른 프로그램은 여러 건축사의 알고리즘을 모듈화 해 누구나 클릭 몇 번으로 건축 안을 생성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도구로 인해 건축이 더 이상 전문가의 영역이 아니라, 누구나 실험할 수 있는 공공 플랫폼으로 발전하고 있다. 건축 설계가 ‘전문 기술’ 에서 ‘데이터 기반의 판단’으로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다시 말해, 설계 행위 자체는 더 이상 건축사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AI와 플랫폼은 아이디어를 빠르게 구체화하고, 대안을 무한히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물의 안전성, 공공성, 사회적 책임은 여전히 건축사만이 감당할 수 있다. AI가 아무리 많은 가능성을 제시해도, 도시와 사람의 삶을 이해하고 균형을 잡는 판단력은 알고리즘이 대신할 수 없다.
결국 AI 시대의 건축사는 ‘형태를 그리는 사람’에서 ‘판단을 검증하는 사람’으로 진화해야 한다. 동시에 협회도 ‘데이터 관리 기관’ 으로서의 역할을 고민해야 한다. 많은 건축 데이터가 플랫폼으로 흘러가고 있다. 상업용 글로벌 AI 플랫폼이 구독서비스를 통해 사용자에게 사용료를 지불하게 하는 방식을 고려해보면, 건축 데이터도 플랫폼과 사용자 간의 갑을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 이것만큼은 절대 지양해야 한다. 플랫폼 사의 알고리즘은 우리 도시의 맥락과 법규, 지역적 정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데이터를 외부로 흡수해간다. 단순한 기술사용의 문제가 아니라, 건축 주권(Architecture of Sovereignty)의 문제다.
따라서 협회는 반드시 우리 고유의 데이터, 건축사의 사고방식을 반영한 ‘한국형 AI 설계 플랫폼’을 자력으로 개발·보유해야 한다. 이 플랫폼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한국 건축사의 집단지성·윤리·전문성을 내재한 ‘공공 인프라’가 돼야 한다. 이러한 기술적 자립은 건축사법과 건축법 속에서 우리의 법적 지위와 업역을 더욱 공고히 하는 기반이 돼야 한다.
또한, AI 시대일수록 법적 테두리 속에서 건축사의 설계·감리권이 보호받고 흔들리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가 강화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협회의 전략적 추진과 함께, 건축사 개개인의 관심과 연대, 그리고 지속적인 참여가 절실하다.
AI가 설계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평준화’시키는 시대에, 진정한 경쟁력은 ‘데이터를 해석하고 맥락화 하는 능력’에 있다. 건축사는 데이터를 통해 환경과 사람, 제도와 경제의 관계를 읽어내고, 거기서 의미 있는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지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AI 가 아무리 발전해도, 건축은 결국 ‘사람의 삶을 설계하는 일’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AI 플랫폼 시대의 건축은 도면이 아니라 데이터로, 감각이 아니라 근거로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이 거대한 전환 속에서 건축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새로운 도구를 익히는 것이 아니라, 그 도구들이 만들어내는 결과의 사회적 의미를 해석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외부 기술 의존을 끊고 우리 스스로 플랫폼을 세우는 일이다. 이를 토대로 건축사법· 건축법 속에서 우리의 업역을 더욱 확고히 다져가는 노력에서 출발해야 한다. AI가 설계 정보의 개방과 공유를 이끌었다면, 건축사는 그 세계의 질서를 세우는 ‘데이터의 철학자이자 직능의 수호자’가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