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건축의 자화상
엔지니어링 단체의 동등 지위 집단적 요구
'나눠먹기'식 접근으론 시장개선 쉽지 않아
건축 본질을 위협하는 발상에 심각한 우려
지난 몇 년간 얼어붙은 건축시장의 여파로 지난 해 몇몇의 대형 건축사사무소들이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더불어 기업으로서의 운영실태가 드러나면서 건축계 저변에 잠복해있던 '협력업체 용역비 미지급'이라는 사회적 병리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업무를 함께 수행한 엔지니어링 협력업체들의 용역비를 지급하지 않아 이들이 연쇄 부도 위기에 처했다는 후문이다.
옳지 않은 업계의 관행은 마땅히 개선되어야 하겠지만 이를 빌미로 건축설계 관련 엔지니어링 단체들이 집단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건축과 엔지니어링 각 분야의 별도 계약 요구나 분담이행방식의 공동수급협정 요구 등은 뒷맛이 개운치 않다. 현재 사회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계약 관계에 있어서 ‘갑을 논쟁’의 연장선 측면에서 보면 엔지니어 측이 주장하는 바는 ‘갑’ 대 ‘갑’으로 업무를 수행하자는 것이다. 건축사나 엔지니어나 해당 설계업무에 있어서 동등한 지위를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요구는 ‘제 밥그릇 챙기기’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작년만 하더라도 건축법 시행령 개정안에 대해 ‘건축전기설비기술사’와 ‘정보통신기술사’ 간의 대립, ‘건축기계설비기술사’와 ‘가스기술사’ 간의 대립 등 엔지니어링 업계 내에서의 업역 다툼이 치열했다. 기득권 보장 등을 내세운 이러한 업역 다툼과 엔지니어링 단체의 이번 집단적 요구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특정 부분에 대한 ‘나눠먹기’식 논리는 건축 과정과 건축 행위, 그 결과물을 포함한 ‘건축’이라는 학문과 현실, 그 본질 자체를 크게 왜곡하기 때문이다.
원론적으로 건축에 의해 다뤄지던 엔지니어링은 18세기 말 산업혁명과 근대적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건축에서 분리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글로벌 스탠다드’라고 할 수 있는 미국 엔지니어링협회가 밝히는 엔지니어링의 정의는 ‘구조물, 기계, 장치나 생산설비 또는 이것들을 개별적으로나 혼합하여 사용하는 작업을 디자인하고 발전시키는 데 과학적 원리를 창조적으로 적용하는 것, 혹은 이것들을 건설하거나 작동하는 것, 혹은 특정한 작동 조건에서 이들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이다. 이처럼 엔지니어링은 문제 해결을 위해 과학적 원리를 적용하는 ‘도구적’ 성격이 강하다. 이를 바탕으로 보면 건축 관련 엔지니어링의 경우 건축사가 검토하고 있는 설계안을 가장 합리적인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즉 국내 건축법 정의에서 드러나 듯 ‘설계자’가 아닌 전문 엔지니어링 분야의 ‘컨설턴트’ 또는 ‘스페셜리스트’로서 참여하는 것이다.
시장현실에서도 설계업무의 시발점인 사업적 측면인 ‘수주’에서 엔지니어들의 역할은 거의 없으며 대표적 엔지니어인 ‘기술사’들의 수가 너무 적은 것이 걸림돌이다. 전문 분야 기술사가 한 명도 없는 지방자치단체도 있는 것이 국내 현실이다. 공동수급을 논의 전에 시급히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 전문 기술사의 배출을 늘려 적정 서비스 제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전반적인 업계의 분위기 역시 심각하다. 2011년 국정감사를 통해 수많은 건축사들을 검찰에 고발한 주체가 ‘한국건축구조기술사회’다. 2012년에도 동일한 문제제기를 하려다 ‘제 식구 감싸주기’가 드러나 실패했다. 이제 와서 상생을 외치고 있지만 건축계에 일으킨 물의에 대해 아직까지 공식적인 사과 한마디 없다. 또한 지난해 11월 구조공학단체 총연합회 초대회장은 취임사에서 ‘독자적인 설계’, ‘하청 관계가 아닌 공동도급제도로의 개선’, ‘건축구조기술사의 구조전문건축사로 명칭 변경’ 등을 주장했다.(일본의 ‘구조전문건축사’는 1급 건축사가 일정 기간 구조와 관련된 업무를 수행한 후 인정되는 자격으로 국내 ‘건축구조기술사’제도와는 차원이 다름을 밝혀 둔다) 그릇된 정보로 현실을 호도하고, 전문가로서의 건축사를 부정하는 이러한 자극이 지속되는 가운데 엔지니어링 업계의 주장은 심정적으로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업무를 수행하고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건축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엔지니어들의 주장은 건축의 본질을 고민하고 한 걸음 더 진보하려는 건축설계 업계의 노력에 역행하는 ‘제 밥그릇 챙기기’로 밖에 보이지 않는, 시장현실을 위협하는 행위임을 자각하기 바라고 건축사들은 코디네이터로서의 역량 강화에 힘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