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근대건축사 산책(21) - 건축의 한류(韓流)는 가능한가: 요시다 테츠로의 구미여행(1931~32)을 돌아봄

2014-02-01     김현섭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부교수
▲ 요시다 테츠로(T. Yoshida)의 ‘일본건축 독일어 삼부작’: 『Das japanische Wohnhaus』(1935), 『Japanische Architektur』(1952) 및 『Der japanische Garten』(1957)

지금까지의 ‘서양 근대건축사 산책’이 작품 하나하나를 방문해 살피는 데 중점을 뒀다면, 이번 여정은 방법을 조금 달리해 보면 어떨까? 일본의 아키텍트 요시다 테츠로(吉田鐵郞, 1894~1956)의 구미출장(1931~32)에 동행함으로써 말이다. 서양 근대건축의 숲이 조성되던 당시의 생생한 광경을 목도한 이방인의 눈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줄 수 있고, 그 또한 역사의 현장에서 일획을 담당하여 은근한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체신성(遞信省)에 속했던 요시다는 도쿄중앙우체국(1927~31)으로 일본 근대건축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로서, 서양 방송국시설 조사라는 명목으로 1931년 7월 29일부터 이듬해 7월 28일까지 정확히 1년 동안 유럽과 미국을 순방하고 돌아왔다. 항해여정과 미국기행 20여일을 빼고도 유럽대륙에서의 체류기간은 9개월을 넘는다. 일부 나날은 방송국 견학과 보고서 작성에 할애했지만, 나머지는 유럽건축의 리더들을 만나고 그들의 작품을 답사하는 데 몰두했다. 매월 서양의 건축지를 탐독하고 1930년에 이미 『世界の現代建築』을 간행했던 그에게 이번 여행은 서양의 모더니즘을 체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고, 동료 야마다 마모루(山田守, 1894~1966)가 두 해 전 같은 방식으로 출장을 다녀온 것 역시 자극이 됐다. (호리구치 스테미 등과 ‘분리파’를 결성했던 것으로 잘 알려진 야마다는 1932년 뉴욕 현대미술관의 『The International Style』에 작품을 올린 유일한 일본인이다.)
요시다는 베를린을 베이스캠프 삼고 유럽 각국을 방문하는데, 그의 일기와 편지에 따르면(向井覺 編, 『吉田鐵郞?海外の旅』, 1980), 취리히에서 CIAM의 수장 기디온과 모저를 만난 것을 필두로 유력한 건축인들과 교류한다. 베를린의 모더니스트만 치더라도 그는 수첩에 포엘치히, 그로피우스, 타우트, 헤링, 멘델존, 샤로운, 미스 등의 이름과 주소를 기록해두고 있었다. 전부터 스웨덴건축, 특히 외스트버그의 스톡홀름시청사(1909~23)에 큰 흥미를 느꼈던 그는 베를린에 정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스톡홀름으로 향한다. 그의 벳부공회당(1926~28)은 이 건물의 낭만성에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10/19 일기] 일본을 떠날 때는 외스트버그도 만날 계획이었는데, 시청사를 실제 본 다음엔 그의 위대함에 압도됐는지 나 자신의 빈약함이 통절하게 느껴져 그를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게 됐다. 그러나 [...] 다시 한 번 용기 내어 처음 계획대로 그를 만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유럽 모더니즘에 대한 그의 입장은 슈투트가르트의 바이센호프지드룽(1927)에 대한 반응에서 더 잘 읽힌다. 이 주택전 당시 현장을 감독했고 건물 두 동을 설계했던 되커가 그를 안내했다. “[12/5 일기] 코르뷔제 것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로피우스는 역시 좋다. 마트 슈탐도 꽤 좋다. 타우트, 포엘치히에는 관심이 없다. 어쨌건 전체적으로 색깔이 좋은 것에는 변함없이 관심을 가졌다.” 그가 코르뷔제에게 무관심했던 것은 다소 의외이나 타우트, 포엘치히보다 그로피우스를 선호함은 표현주의(벳부공회당)에서 합리주의(도쿄중앙우체국)로 전이된 그의 경향을 보여준다. 한편, 건물 색깔에 대한 그의 관심은 흑백사진으로 간과돼온 근대건축의 중요한 단면을 일깨우는 인자라 하겠다.
그럼에도 여기서 우리가 더 눈여겨볼 점은 요시다의 여행이 일본건축을 서양에 알리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유럽 모더니스트들이 일본주택에 흥미를 가지고 있음에 놀라는데, 그들과 이에 대해 논하기도 하고 일본 미닫이창의 디테일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특히 그가 자기 포트폴리오 격으로 제작해갔던 『新日本住宅圖集』(1931)은 바우하우스 강연(11/7)에서 교재로 사용됐으며, 무엇보다 스웨덴의 아스플룬트에게 즉각적 반응을 도출했다. 요시다를 만나고(10/22) 얼마 후 스톡홀름왕립공학원 교수가 된 그는 취임강의(11/19)에서 일본주택의 융통성을 강조했는데, 출판된 강의원고에 이 책자에 있던 요시다의 나스산장(1927) 사진을 게재했기 때문이다(『Byggmastaren』, 1931). 이러한 요시다의 행보는 마침내 1935년, 서양에서 일본건축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Das japanische Wohnhaus』(일본의 주택)를 출간하는 결실을 가져온다. 서문에서 그는 베를린 체재 당시 이 저술을 권유한 헤링과 힐버자이머에게 감사를 표했다. U. 쿨터만(1960)에 따르면 이 책은 “유럽과 미국에 상당한 소요”를 일으켰고, M. 슈파이델(2005)은 이를 “30년 걸친 일본주택에 관한 미스터리의 해답”이라고 까지 추켜세웠는데, 실제로 알토나 아이어만에게 이는 결정적인 참고서가 됐다. 이와 같은 효과는 그 개정판(1954)과 영역본(1955)을 잇따르게 했고, 1952년과 1957년에는 『Japanische Architektur』와『Der japanische Garten』도 출간돼 요시다의 ‘일본건축 독일어 삼부작’을 이룬다. 요컨대 요시다의 저술은 일본건축을 서양에 알리고 그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됐는데, 배경에는 1년간의 구미출장이라는 역사적 행보가 있었던 것이다.

▲ 아스플룬트의 스톡홀름왕립공학원 교수취임 강연, 1931.11: 출판된 강의원고에 요시다의 나스산장이 게재됨(『Byggmastaren』, 1931).
▲ 요시다(1935)를 참조한 알토의 마이레아저택(1937~39: ⓒ김현섭) 및 아이어만의 자택(1959~62)
▲ 摩徹郞(당시 요시다의 필명),『新日本住宅圖集』(1931): 안쪽 커버 및 나스산장(1927) 페이지 (ⓒ김현섭)

『Das japanische Wohnhaus』의 성공 요인으로, 무엇보다 저자가 일본에서 교육받고 실무를 경험한 ‘일본인 아키텍트’였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다. 그 전까지도 다수의 일본건축 서적이 서양에 출판됐었으나 대개 서양인에 의한 것이었고, 실무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허나 이 책은 일본주택의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기술적 디테일에 이르기까지를 정확하고 간결하게 서술한 점이 특징이다. 둘째 요인은, 그 출판 시점이 유럽에서 일본건축에 대한 관심이 고조에 이르렀을 때였다는 사실인데, 그가 강조한 일본건축의 ‘합리성’과 ‘표준화’는 유럽 모더니즘이 추구했던 사안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베를린의 유력한 바스무스社(Verlag Ernst Wasmuth)를 통해 출판된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 출판사는 라이트의 포트폴리오(1910/1911)로 유럽 건축계에 영향력을 발휘한 바 있다.

▲ 미국행 범선 ‘브레멘號’에서의 요시다, 1932.6 (당시 38세)

비록 아주 오래 전 남의 동네 이야기 같지만 요시다의 스토리에서 우리는 간접적이나마 곱씹을 교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이른바 건축의 ‘한류(韓流)’를 천명하는 요즘이라면 말이다. 우리 건축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것을 누가 환영치 않겠느냐마는, 방점은 화려한 전시성의 ‘겉보기등급’보다 문화로서의 건축을 향한 사회 전체의 묵직하고 꾸준한 내적 숙성에 찍혀야 할 테다. 그래야만 디자이너와 역사가의 작업이 함께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으리라. 요시다의 활동 시에 일본은 이미 그랬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