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허승회 PDI디자인그룹 회장 “건축은 사람을 위한 것…사용자가 중심되고, 커뮤니티에 공헌하는 설계 지향해야”
TLPA 인턴에서 CEO까지 인수합병 후 PDI디자인그룹 28년째 이끌어 “한국 건축사와 교포 건축사의 협업, 또 다른 시너지 기대”
허승회 PDI디자인그룹 회장이 대한건축사협회 건축사교육원의 2025년 건축아카이브 특별강연 연사로 한국을 찾았다. 지난 10월 20일 진행된 강연에서 앞서 대한건축사신문은 허승회 회장을 만났다. 54년간 건축의 역사를 통해 미국 건축사이자 경영인으로서 자신을 ‘건축 리더’라고 명명한 허승회 회장의 건축 철학과 건축에 관한 의미를 들어봤다.
“저는 스스로를 ‘건축 리더’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한 리더는 마스터 빌더(Master Builder)를 의미합니다. 건축사에게 가장 중요한 재능은 단연코 디자인이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건축 전반을 아우르는 리더의 역할을 지향했습니다. 유학생으로 TLPA에서 인턴생활을 시작했던 당시의 저는 미국에서 많은 것을 배운 뒤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당시 유학생들은 졸업 1년 후 귀국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기에, 돌아가기 전까지 최대한 일을 많이 배워야겠다고 생각해 프로젝트마다 자원했고, 회사 운영에 참여하면서 건축 전반에 대해 알려고 노력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런 경험이 쌓이고 쌓여 지금에 이른 게 아닐까 싶습니다.”
중·고교 시절 문예부 활동을 하던 그는 한양대학교 건축과에 입학하며 건축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이후 박정희 정부 시절 문화교육부 공무원으로 근무하며 세계은행 교육 차관사업에 참여했고,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건축대학원에 진학했다.
유학 시절 레너드 파커 교수를 만나 그의 사무소 TLPA(The Leonard Parker Associates)에서 1972년 인턴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6년 뒤인 1978년 TLPA의 준(Associate) 파트너, 1980년에는 최연소 정(Full) 파트너가 됐다. 1997년에는 CEO로 취임했으며, 이후 TLPA는 1999년 듀란트 사와 합병해 PDI(Parker Durrant International) 그룹으로 확대됐다. 2006년 듀란트 사와 분리한 뒤 현재의 PDI디자인그룹을 설립해 이끌고 있다. 현재 전 세계 150여 개 디자인그룹이 참여하는 PDI 컨소시엄을 운영하며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건축인으로서 세계적 디자인그룹을 28년째 이끌고 있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제가 최고경영자로 불리지만, 그 역할은 프로젝트를 수주하고, 그것이 제대로 설계가 되는지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최고경영자도 설계의 일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건축사로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실제로 준공되는 건축물을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건축을 시작한 지 5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준공된 건축물을 보면서 큰 기쁨을 느낍니다. TLPA 시절부터 동료들이 본인이 차린 사무소에서 파트너가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때 저는 진지하게 기념비적이고 대형 건축물들을 설계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당시엔 모두 꿈 깨라는 식으로 대꾸했지만 저에게는 이룰 수 있는 미래와 같았습니다.”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허 회장이 아끼는 작품이 있다. 1974년 설계한 미네소타 법학대학원이다. 에너지 절약을 강조해 패시브 솔라 시스템, 일광, 옥상 정원 등이 설계에 포함됐다. 또한, 건축물이 위치한 남쪽 도로의 소음을 차단하고 경관 확보를 위해 언덕을 디자인했고, 층층이 큐비클을 쌓아 올렸다.
미네소타 주 대법원·고등법원도 빼놓을 수 없다. 기존 역사관을 포함하고, 법원의 기능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건축과 현대건축을 융합시킨 이 작품은, 음양의 기법을 설계에 적용해 설계공모에서 당선됐다.
서울 한남 더힐, 삼성동 현대아이파크, 부산 벡스코 등 한국에서의 작품 활동도 그에게는 의미가 깊다.
서울 삼성동 아이파크 프로젝트는 종합건축사사무소 건원과 협업해 진행됐다. PDI 그룹은 50층 높이의 주거 타워를 설계하며 남향 배치와 한강 조망 등 자연 요소를 극대화해 당시 30층 이상 주거 타워가 불가능하다는 통념을 깨뜨렸다.
무영종합건축사사무소와 협업한 한남 더힐은 PDI디자인그룹 분사 이후 진행된 프로젝트로, 남산과 한강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고급 주거단지다. 유닛 사이에 스카이가든을 배치해 친환경적 공간으로 설계됐다.
일신설계종합건축사사무소와 협업한 부산 벡스코는 이용흠 회장과 ‘부산의 상징성’을 논의한 끝에 날개를 펼친 갈매기 형상을 도입, 도시의 진취성을 표현했다.
“한국과 미국에서 실무를 하다 보면서 양국의 차이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가장 아쉬운 점은 역시 설계비입니다. 1985년에 광주 공학대학 캠퍼스 마스터플랜을 진행할 기회가 있었지만, 당시 법정 설계비의 절반 정도를 제안받아 고심 끝에 프로젝트를 포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이후 한국에서도 기존보다 설계비를 10배 정도 올려 세계화를 실현하려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또 미국의 경우, 감리 과정에 설계자가 반드시 동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보험사에서 책임보험 가입을 거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미국 보험사 입장에서는 설계를 오랫동안 진행한 설계자가 감리까지 맡아야 하자율이 줄어든다고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PDI 디자인그룹은 ‘사람을 위한 디자인’을 지향한다. 인간적 유대를 이해하고 강화하는 디자인 철학은 허승회 회장의 스승인 레너드 파커 교수에게서 사사했다. 파커 교수 역시도 그의 스승인 에로 사리넨(Eero Saarinen)의 가르침을 이어받았다. 사람을 위한 디자인의 지향점은 PDI디자인그룹의 미션으로 이어진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디자인 능력으로 커뮤니티와 사회에 공헌하고자 합니다. 오랫동안 다채로운 프로젝트를 이어가면서도 이 미션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프로젝트마다 예산, 위치, 환경 등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건축물을 설계할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PDI 디자인그룹은 시그니처 디자인과 스타일을 지향하기보다 클라이언트의 꿈을 현실화하는 것이 건축사의 임무라고 생각하기에, 사용자가 중심이 되고, 나아가 커뮤니티에 공헌해야 한다는 철학을 담아 설계를 진행합니다. 물론 시그니처 디자인과 스타일을 담아 설계를 하는 것은 많은 건축사들의 꿈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기회가 온다면 즐겁게 설계를 진행할 것입니다.”
한국의 문화적 저변이 넓어지는 요즘, 허 회장은 한미 양국의 건축적 교류를 꿈꾼다.
“한국 건축사의 재능을 알릴 수 있는 여러 방법 중 하나로 현지 교포 건축사와의 협업도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든 교포가 있습니다. 한국인이라는 문화적 정체성을 공유하면서도, 현지 문화에 익숙한 교포와의 협업이 또 다른 시너지를 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가 조금 더 유대관계를 갖고 함께 교류한다면 AI 시대에 한국적이면서도 이국적인 건축문화를 형성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건축이 운명이었습니다. 전체를 보고 리딩하는 건축적 경험이 쌓여 지금에 이른 만큼, 앞으로도 건축을 이어갈 많은 분들도 운명처럼, 건축의 리더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