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삶] 지방에서 건축사로 살아남기
지방에서 건축사로 살아남는 일은 버티기의 기술이 아니다. 화재로 보금자리를 잃은 가족의 집을 설계하던 날, 왜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 선명해졌다. 동네 발전속도와 상처에 맞춰 호흡을 고르고 과장을 덜어내며, 필요한 것을 정확히 놓는 일. 그게 이곳에서의 건축이었다.
학창 시절 그림을 따라 그리며 손의 감각을 키웠고, 역사소설을 넘기며 이야기를 쌓았다. 도면과 제도가 언어가 되자 현장은 교과서보다 친절했다. 전공과 맞닿은 군 생활로 시간을 경력으로 바꾸는 법을 배웠고, 사회로 돌아와서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간대학에서 공부하며 길을 넓혔다.
긴 시험 끝에 건축사 자격을 얻었고, 고향에 사무실을 열어 공공과 민간의 작은 프로젝트를 오가며 오래 버텼다. 지역에서는 위원회 활동으로 논의의 장에도 참여했고, 대학원에서는 한옥을 공부하며 백제의 고도인 부여에 지역성을 반영한 문법을 다시 익혔다.
지방에서의 생존법 중 첫째는 ‘적정’이다. 있는 예산과 관리 역량을 기준으로 해법을 세우고, 특수한 디테일은 줄이며 현장에서 적용 가능한 공법으로 풀어낸다. 멋을 덜어낼수록 유지관리는 쉬워지고 건물은 일상의 시간을 견딘다. 건축주와의 상담에서는 화려한 렌더링보다 장마철 계단의 미끄러움, 처마 물받이 설치의 장단점, 배수 막힘, 완공 후 사용자의 유지관리의 어려움 같은 장면을 먼저 떠올린다. 건축주의 하루를 상상하다 보면 불필요한 욕심이 자연스럽게 빠진다.
둘째는 투명한 소통이다. 일정과 비용, 리스크를 초반부터 열린 판으로 공유하고, 변경 가능성과 의사결정의 기준을 신뢰를 바탕으로 합의한다. 초기 상담에서는 법적 조항을 나열하기보다 생활의 언어로 말한다.
향에 따른 공간 배치, 출입문을 안으로 열지 밖으로 열지와 같은 소소하지만 현실적인 사항들, 건축법상 신고와 허가의 차이, 감리와 현장관리인의 역할, 설계변경과 일괄 처리 사항의 구분, 산재보험 의무가입과 재해예방기술지도 같은 일반 행정 절차까지 구체적으로 쉽게 설명하고 보여주면 민원은 줄고 수정은 덜 아프다.
셋째는 사람을 세우는 일이다. 지역은 인력 풀이 얕다. 그래서 신입을 받아 도면과 현장을 함께 익히게 하고, 커뮤니케이션을 업무의 절반으로 가르친다. 모두가 남지는 않지만, 한 명의 직업인이 지역에 뿌리내릴 때 생기는 파장은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 전공이 아닌 이도 열정과 의지만 있으면 함께해서 기초부터 훈련해 스스로 판단하는 힘을 갖게 하려 노력 중이다. 설계는 결국 사람이 만든다.
요즘 ‘건축사 업무대가 정상화’가 화두다. 맞는 말이다. 제대로 된 대가를 받아야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사무실도 지속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스스로 묻는다. 우리는 그 대가에 맞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지방에서는 건축주가 때로 설계를 흥정하듯 바라본다. 나는 처음 상담 자리에서 법적 절차와 서비스 범위를 충분히 설명하고, 서로 합의된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하려 한다. 건축은 거창한 이론보다 건축주와의 합의,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켜내는 일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돌아보면, 나를 지방에 붙잡아둔 건 ‘큰 건축’의 유혹이 아니라 ‘필요한 건축’의 손맛이었다. 지역에서 필요한 건축을 묵묵히 해내며 작은 변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프로젝트는 작아도 그것을 통해 쌓이는 경험과 보람은 크다. 지방에도 좋은 건축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이 자리를 지켜야 하고, 나는 그 길을 기꺼이 이어가고 싶다. 건축은 결국 삶을 짓는 일이며, 그 삶은 지방에도, 우리 곁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