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근대건축사 산책(20) - 사회적 응축기로 인민을 계몽하려 하다!나르콤핀 거주시설(The Narkomfin Housing, 1928-1932)
“진정한 여성해방과 공동체의 실현은 인민들이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개개인이 아닌 사회적(공동)으로 해결하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선언은 러시아의 근대건축운동 중 하나인 ‘OSA(The Union of Contemporary Architects, 1925)의 사회적 응축기(Social Condenser)’라는 개념의 기원이 되었던 레닌(V.I. Lenin,1879~1924)의 것이다. 1917년 10월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레닌은 자본주의 속에 근본적으로 내포된 경제적 구조의 불합리성과 계급 간 불평등의 해소를 위해 가장 작은 사회구조 단위인 가정에서부터 계급과 노동의 평등함을 외쳤다.
러시아의 근대건축 운동들은 레닌의 혁명이 성공한 대략 1917년부터 꽃을 피워, 스탈린이 정권을 잡은 1930년대에 지고 만다. 여느 독재자처럼 스탈린은 코드의 부활을 꿈꾸었고 1931년 소비에트 궁전 현상은 그 신호탄이었다. (신문제159호 ‘파시스트의 집’ 편 참조)
1918년 “Free Workshop”이라는 교육기관을 시작으로 러시아의 근대건축운동은 시작되었다(이 교육기관은 독일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와 그 역할과 지향점이 유사하다). 운동은 결국 두 집단으로 양분되었는데, 하나는 절대주의회화(Suprematism)의 창시자로 알려진 말레비치(Kasimir Malevich, 1878~1935)를 중심으로 한 이성주의자(rationalists) 또는 구성주의자(Compositionists)와 다른 하나는 제3국제주의타워(the 3rd International tower, 1920)로 유명한 타틀린(Vladimir Tatlin, 1885~1953)을 주축으로 한 구축주의자(Constructivists)였다.
이들은 이념적으로는 코드의 삭제(제00호 ‘데 스타일’ 편 참조, 미학적으로 러시아 이성주의자들의 결과들은 구상적인 것으로부터 추상으로 나아갔던 몬드리안의 것과는 다르게 애초부터 구상적 요소를 배제하고 출발했다. 계급과 위계의 삭제에 있어 더 과격했다고 볼 수 있다.)라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현상을 대하는 태도와 그 결과는 달랐다. 이성주의자 측이 코드가 삭제된 순수한 형태를 찾고 그것을 통해 이념의 재현을 추구했다면, 구축주의자들은 물리적인 구축성과 산업/생산품과의 접목을 통해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접근을 강조했다.
이 두 경향은 1925년 프랑스의 이성주의와 이탈리아의 미래주의를 골고루 섭취한 유대인 건축사 긴즈브르흐(Moisei Ginzbrug, 1892~1946)에 의해 OSA라는 단체를 중심으로 통합되고, 두 집단의 교집합이던 코드의 삭제는 앞서 언급한 레닌의 선언을 바탕으로 하여 사회주의적 계발 장치인 사회적 응축기로 변환되어 등장한다.
응축기는 열을 발산함과 동시에 기체상태의 물질을 액체 상태로 바꾸는 장치다. 한마디로 어떤 물질의 밀도를 높이는 작업을 한다. 러시아 근대건축운동에서 사회적인 응축기는 산업혁명 이후 유럽을 휩쓸고 있는 자본주의적 잔재를 방출시킴과 동시에 사회주의이념과 그 체제에 적합한 인민으로 응축하는 건축적 장치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장치는 건축적으로 어떻게 실제화 되었을까?
인민의 계몽은 바로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부터 시작했고, 그것은 공동거주시설과 노동자 클럽, 탁아소, 공동세탁소, 체육시설 등 집산적 시설로 드러난다. 특히 레닌은 엥겔스의 영향으로 여성의 사회적 참여를 장려했는데, 그 중심에 돔 커뮤나(Dom-Kommuna)로 불리는 집산적 거주시설이 있었다. 긴즈브르흐의 나르콤핀 거주시설(Narkomfin housing, 1928~1932)은 거주시설과 집산적 시설이 복합적으로 구성된 대표적인 돔 커뮤나다.
시설은 두 가지 타입의 평면으로 구성된 약 50여 호의 주거시설이 배치된 긴 매스의 본동과 집산적인 시설(공동주방, 매점, 탁아소 등)들이 모여 있는 부속동 그리고 이 둘을 연결하는 브리지로 구성되어 있다.
라멘조라는 구조적 이점으로 필로티와 입면에는 띠창이 보이고 옥상은 펜트하우스와 정원으로 구성되어 마치 르꼬르뷔지가 주장한 근대건축의 다섯 가지 원칙에 충실한 듯 하지만 오히려 나르콤핀은 르꼬르뷔지에의 실험적 공동주거시설인 유니테다비다시옹(United’ Habitation, 1947~1952)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사실상 아파트라는 공동거주시설의 전형이 되었다.
긴즈브르흐는 실제로 르꼬르뷔지에가 주장한 기계로부터 유추된 미학과 기능 등 그의 건축이념에 공명했다. 그러나 르꼬르뷔지에보다 긴즈브르흐는 이 같은 이념들을 극단적으로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르꼬르뷔지에가 건축을 “살기 위한 기계”로 여겼다면 긴즈브르흐는 더 나아가 “살게 하는 기계”로 여겼다. 건축으로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은 문명만으로 문화를 만들 수 있다는 극단의 실증주의(Positivism)다. 극단의 실증주의는 이탈리아의 미래주의운동에서도 보이듯이 자국의 후진성에 대한 피해의식이 강할 때 등장한다.
러시아도 예외는 아니었을 터, 스탈린이 정권을 잡고 고전으로 회귀하는 바람에 이 위험한 실험은 중단되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노동자들을 사회주의 시스템에 적합하게 계몽하기 위한 거주형식이던 공동거주시설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잘 기생하여 우리나라의 거주유형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주거가 되어버렸다. 그것도 고급거주 형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