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정유진 건축사, 국가유산 실측에서 한옥 설계까지…“현장에서 배운 실측, 설계 바탕 돼”

1998년 팔달문 실측으로 시작해 여러 유산 현장 기록 현장소장 경험 바탕으로 봉화서 설계 작업 이어가 경북 북부 전통건축 흐름, 실측과 설계로 담아내

2025-07-23     장영호 기자
정유진 건축사(유진 건축사사무소, 경상북도건축사회)는 1998년 수원 화성 팔달문 실측을 시작으로 무량사, 법주사 대웅보전, 동묘 등 주요 국가유산의 실측설계를 수행해왔다. 현재는 경북 봉화를 기반으로 보수설계와 신한옥 설계를 병행하고 있다. (사진=유진 건축사사무소)

국가유산을 보수하거나 복원하려면, 먼저 그 건축물이 어떻게 지어졌는지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이를 맡는 국가유산수리기술자(실측설계)는 국가유산 현장에서 정밀 실측과 해석을 수행하며, 도면 속 선의 배치 너머에 담긴 구조와 공간의 기능적 의미를 읽어내는 역할을 한다.

정유진 건축사는 1998년 수원 화성 팔달문 실측을 시작으로, 무량사 법주사 대웅보전 서울 동묘 금강산 신계사 석탑 등 주요 유산의 실측을 맡아왔다. 이후 국가유산 현장소장으로도 활동하며 실측부터 시공까지의 과정을 현장에서 체득했다. 현재는 경북 봉화에 머무르며 지역 국가유산의 보수설계를 중심으로 실측설계를 이어가는 동시에, 전통 방식의 신축 한옥 설계도 함께 수행하고 있다.


우연한 기회로 경북도청 인근 한옥마을에 대지를 구입하게 되면서 직접 소박한 한옥을 지어 거주하게 됐고, 이 경험은 전통건축을 삶의 공간으로 구체화하는 감각을 키우는 데 큰 계기가 됐다.

그가 활동 중인 경북 북부는 안동, 영주, 예천, 봉화 등 유서 깊은 건축 유산이 밀집한 지역이다. 특히 봉화에는 충재 권벌의 청암정, 거촌리 쌍벽당, 가평리 계서당, 해저 만회고택 등 조선시대 양반가의 건축적 특성이 잘 보존된 건물들이 남아 있다. 이러한 건축물의 보수설계를 중심으로 정유진 건축사는 지역 기반의 실측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국가유산 실측설계가 현장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의 경력을 통해 살펴봤다.

Q. 1998년 화성 팔달문, 화서문 정밀실측조사가 첫 실측 경험이셨다고 했습니다. 당시 추운 겨울에 한 달간 현장에 계셨던 경험이 인상 깊다고 하셨는데,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1998년 건축사사무소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처음 나간 현장이 화성 팔달문과 화서문 정밀실측조사였습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레이저 스캐너나 디지털 장비가 없었고, 전적으로 수작업으로 실측을 진행했습니다. 한겨울이라 손이 얼어붙을 정도였고,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때도 한 장 한 장 아껴가며 촬영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현장에 투입되어 하루하루 배워가던 그 시기가 저에게는 실측의 기본을 몸으로 익혔던 시간이었습니다. 그 경험은 지금까지 실측설계의 기준점이 되고 있습니다.

법주사 대웅보전 실측 당시(사진=유진 건축사사무소)

Q. 부여 무량사, 법주사 대웅보전 등의 실측을 통해 한식 중층 목구조를 접하게 되셨다고 했습니다. 이 시기의 실측 경험이 이후 실측설계자로서 어떤 기반이 되었는지요.

무량사와 법주사 대웅보전은 모두 한식 목구조 중에서도 중층구조를 갖춘 주요 전각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구조물을 실측하면서 목구조의 짜임과 구조적 흐름, 부재의 기능과 배치 원리를 실제로 체득할 수 있었습니다. 실측설계자는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기본임을 이때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실측을 하며 구조를 해석하는 설계 감각이 이때부터 몸에 익었습니다.

동대문 서울성곽 이간수문 공사 후(사진=유진 건축사사무소)

 

동대문 서울성곽 자문회의 2009년(사진=유진 건축사사무소)
수원 팔달문(사진=유진 건축사사무소)

Q. 2009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파크 서울성곽 정비공사에서 자하 하디드의 설계 변경, 작업 공간 부족 등 어려움을 겪으셨다고 했습니다. 이 공사에서 설계와 유산의 공존을 현장에서 어떻게 조율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 공사는 현대건축과 문화유산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였습니다. 서울성곽과 이간수문의 유구가 예상보다 온전하게 남아 있어 설계 변경이 필요했고, 자하 하디드 팀도 이를 존중해 설계안에 반영했습니다. DDP 공사와 병행되며 공간과 동선, 시간 조율 등의 문제도 있었지만, 각 공정과 긴밀히 협의하며 풀어나갔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역사성과 현대성을 함께 담아낸 좋은 사례로 남았고, 문화유산을 다룰 때 타 분야와의 협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운 계기였습니다.

Q. 2013년 봉화에 건축사사무소를 개업하신 이후, 처음에는 일반 건축물까지 설계하셨다고 하셨는데요. 당시 경험이 이후 국가유산 실측설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요.

건축사사무소를 개업하고 처음에는 우사나 소규모 농촌 건축물 등, 국가유산과는 다른 성격의 현대 건축도 경험했습니다. 그 경험은 국가유산 실측설계에 실용적 시각을 더하는 데 밑거름이 됐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 한옥을 복원하거나 신축할 때, 실생활에 기반한 설계를 하는 데 유익한 경험이었습니다. 국가유산과 현대 건축의 경계에서 균형을 잡는 능력이 이 시기에서 많이 다듬어졌습니다.

Q. 현재 봉화에서 실측설계와 함께 신축 한옥 설계도 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본인이 거주할 한옥을 직접 설계하신 경험이 있다고 하셨는데요, 그 과정이 국가유산 실측설계 업무에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되었는지, 또는 어떤 점에서 이어진다고 느끼셨는지 말씀해 주세요.

경북도청 옆 한옥마을에 땅을 구입하게 되면서 제가 직접 거주할 한옥을 설계했습니다. 실제 거주자가 되어보니, 실측설계만 할 때는 보지 못했던 생활의 흐름, 자잘한 기능적 요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다른 현대식 한옥을 설계할 때도 사용자의 생활 방식에 맞는 구성을 고민하게 됐습니다. 실측설계가 과거를 이해하는 일이라면, 신한옥 설계는 그 가치를 오늘의 삶에 연결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