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근대건축사 산책(19) -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바르셀로나 독일관 (1928~29) 흐르는 공간의 경계흐리기
서양 근대건축의 대표적 아이콘으로, 발터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 신교사(1925~26) 및 르 코르뷔제의 사보아 저택(1928~31)과 함께(본 연재물 12회 및 17회 참조), 미스 반 데어 로에(1886~1969)의 바르셀로나 파빌리온(1928~29)이 거론돼왔다. 1929년 바르셀로나 국제박람회를 위한 독일관 말이다. 이 건물은 미스 경력 전반기, 즉 1938년 도미 전 시기의 최고 걸작일 뿐만 아니라, 넓게는 유럽 근대건축운동의 결정체로도 간주된다. 하지만 이는 박람회 건물의 성격상 그로피우스나 코르뷔제의 작품과 달리, 행사 후 곧바로 철거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적 상징성은 이 작품을 빛바랜 사진 속의 아련한 기억으로만 남게 하지 않았다.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은, 흔히들 표현하듯 ‘재를 털고 다시 솟아오른 불사조처럼’, 1986년 동일한 자리에 고스란히 복원된다.
프로젝트 착수시의 미스는 다양한 실험과 활동으로 국제무대에서 막 두각을 나타내던 40대 초반의 아키텍트였다. 페터 베렌스에게서 수련한(1908~12) 후에도 여전히 전통적 방식의 건물을 설계했던 그는 20년대에 들어서며 건축관의 명백한 전환을 보인다. 1921년과 22년에 연달아 제안한 유리외피의 고층건물은 자신이 훗날 미국에서 실현할 강철-유리 마천루의 기원이 됐으며, 콘크리트건물 계획안(1923)과 벽돌주택 계획안(1924)은 여러 재료의 가능성을 탐구한 대표적 사례다. 당시 그는 휴고 헤링을 비롯한 베를린의 진보적 모더니스트들과 교류했고, ‘노벰버 그룹(Novembergruppe)’과 ‘데어 링(Der Ring)’에서 활동했으며, 테오 반 두스부르흐 등과 <G>라는 잡지를 발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근대건축사의 중요 이벤트였던 1927년 바이센호프주택전의 디렉터로 활약하며 신건축(Neues Bauen)의 선두주자로 나섰던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건축을 향한 일련의 노력이 바로 바르셀로나에서 큰 도약을 이뤘다고 하겠다.
이 건축물의 특성은 구축법과 공간성, 그리고 재료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파악될 수 있다. 여기서 구축과 공간의 문제는 비교적 밀접히 동반되는 반면, 재료성은 꽤 독립된 주제인 듯하다. 후자에 대한 충분한 인지는 비교적 뒤늦게야 가능해진 셈인데, 1980년대의 재건 이전에는 흑백사진 가운데서 그 물성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반짝이는 크롬의 금속성과 커다란 유리면이야 그렇다 하더라도(물론 유리창 역시 초록빛, 회색빛, 우윳빛 등의 색조가 가미된 것이 사용됐음을 간과할 수 없지만), 아이보리 색깔의 석회암과 청록색의 대리석, 그리고 황갈색의 줄마노와 같은 고급 석재가 선사하는 풍부한 미감은 직접 경험치 않고는 감히 판단하기 힘든 요소다. 설령 거의 동시에 건축된 체코의 투겐타트 주택(1928~30)에서 그 맛의 일부를 가늠하고, 1950년대 시카고와 뉴욕의 몇몇 작품에서 그 재료의 감성을 잠시나마 상상하게 된다 할지라도, 바르셀로나의 작은 전시관에 농밀히 집약된 물성의 관능적 체험에는 비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재료적 특성이야말로 불사조의 부활이 새로이 각인시킨 근대주의 건축의 일면으로서, 통상 떠올리던 ‘백색의 건축’이나 ‘신객관주의’와 큰 괴리를 보인다.
그러한 괴리는 재료의 감수성이 근대건축의 요점에서 벗어나 있었음을 반증하며, 결국 우리 관심을 구축법과 공간성이라는 당대의 핵심 의제로 재조정해준다. 바르셀로나 독일관은 기본적으로 여러 개의 직사각형 판이 기단과 벽면과 지붕을 이루는 형국이며, 그 영역은 크게 전시실, 부속실, 그리고 풀(pool)이 있는 옥외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는 물론 전시실이 중심인데, 미스는 이를 여러 면의 교차된 판(석재벽과 유리벽)으로 구획함과 동시에 여덟 개의 기둥을 세움으로써 구조부재와 칸막이벽을 분리했다. 여기서 우리는 쉬이 코르뷔제의 도미노 골조(1914~15)가 보여준 여섯 개의 기둥과 ‘자유평면’을 떠올리게 된다. 특히 십자단면의 크롬도금 기둥이(보 같은 수평부재 없이) 천정과 직접 만나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비록 천정 속에 복잡한 구조의 논리가 감춰져 있지만 외적으로 드러난 기둥과 수평면의 결합은 명징하고 경쾌하여 코르뷔제의 그것을 뛰어넘는다(사보아의 출입구쪽 필로티가 지지하는 수평재를 보라). 허나 바꿔 생각하면 미스의 기둥은 굳이 없어도 무관한 잉여물일 수 있다. 석재 벽면을 모두 내력벽으로(하고 천정 속 얼개를 조정)한다면 거뜬히 지붕판을 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건물을 높이 평가했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도 기둥에 대해서만큼은 비판적이었는데, 프란츠 슐츠(1985)가 변호하듯 이는 구조적 이유 때문이라기보다 질서의 표현을 위해서였다고 이해하는 편이 타당해 보인다.
여기서 미스의 벽면들은 다변화된 공간의 형성을 위한 충실한 봉사자다. 전시실은 직사각형의 단순한 지붕면으로 덮여 있지만 아래의 내부공간은 외부와 다방향으로 얽히며 좀 더 복잡한 직교체계의 흐름을 이룬다. 그리고 이 흐르는 공간은 벤치가 있는 기다란 독립벽으로도 안내되어 무한한 확장성을 암시한다. 이러한 벽면구성과 공간흐름에 대한 미스의 개념은 전술했던 수 년 전의 벽돌주택 계획안에 이미 나타났었는데, 이는 데스틸의 반 두스부르흐가 면과 공간의 3차원적 조합으로 명백히 강조한 바이며, 역으로 이 네덜란드 예술가 그룹은 그런 공간에 대해 미국의 라이트로부터 빚지고 있었다. 흐르는 공간과 이를 통한 내외부의 경계흐리기에 대한 미스의(그리고 미스의 개념을 강조하고픈 역사가들의) 천착은, 불명확하나 은근한 제스처를 통해서도 감지할 수 있다. 출판된 박람회 당시의 사진 대개가 전시실 출입구 두 개소의 문을 모두 제거한 채로(혹은 문의 설치 전 상태를) 촬영됐던 것이라는 점이 그러한데, 마치 출입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 실내외의 구분이 원천적으로 불가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게다가 대개의 출판된 평면에도 출입문은 작도돼 있지 않다. 어디부터가 내부이고, 어디까지가 외부인가? 그러나 꼼꼼한 관찰자라면 출입문이 부재한 사진 속에서도 문의 경첩이 놓일 홈을 간파할 수 있으며(복원된 건물에서처럼 문은 원래 존재했다), 내외부 공간의 관입이라는 개념이 실제보다 과도히 강조됐음을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바르셀로나의 공간 개념이 뿌리부터 훼손될 수는 없을 듯하다. 평상시 활짝 열린 문은 분명 내외부의 구분을 모호케 함이 사실이다. 특히 게오르크 콜베(Georg Kolbe)의 조각이 세워진 전시실 안쪽의 지붕 없는 수공간은 분명 내부이자 외부이며, 외부이자 내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간적 특성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 건물이 비교적 단순한 기능의 전시관이자 임시시설이었기 때문이다. 유사한 개념의 투겐타트 주택이 그 같은 공간의 적용에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 않았나? 한편,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의 미스는 직사각형의 중성적 기하체계로 점점 공간을 가두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