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보는 세상] 엘리엇 생각

2025-05-12     함성호 시인

엘리엇 생각
- 윤성근


내가 짧은 능력과 식견으로 돼먹지 않은 두 편의
미간행 장시를 발표한 것은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나는 당신을 닮고 싶었던 것.

그러나 될 일도 될 턱도 없어 가슴에 묻고
예이츠도 키츠도 셰이머스 히니도 
딜런 토마스도 아닌​ 
많은 시인들 가운데 또 김수영도 정지용도 
미당도 이상도 아닌
그 숱한 위대한 시인들 가운데 유독 당신 하나만을
칭송케 되었는데

어느 해 크리스마스 무렵 술 취해 막 이사한 
아파트를 못 찾아
택시에서 내려 어추어추 30분 이상 헤맬 때
당신의 시 <네 사중주>의 일 절 우리가 부단히 애써 인생을 살면
처음인 그 끝자리로 돌아오게 되리란 구절이 
떠올라
곧장 택시 내린 곳으로 돌아와
뒤돌아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 성큼 집으로 찾아 
들어갔던 것.

혹시 이런 모습을 시인이 내려다보고 있지나 
않을까 해서
일순 계면쩍어하면서.
 

- 윤성근 시집 ‘나 한 사람의 전쟁’ 중에서/ 마음산책/ 2012년

윤성근 시인의 시를 많이 읽어 본 것은 아니지만 읽은 몇 편의 시들을 보면 그는 지독히 문학을 사랑했다. 시인들을 사랑했고 그런 시들을 꿈꿨다. 때로는 그런 시를 쓰지 못하는 자신을 향한 한탄도 있지만 정말 시가 현현하는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시인이 읽었던 엘리엇의 시 구절은 아마 이랬을 것이다.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 있을 수도 있었던 일과, 있었던 일은/ 한 끝을 지향하며 그 끝은 언제나 현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