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진단】 “설계자의 권리 사각지대, 설계의도 구현 대책 필요”
설계자 의도, 시공 과정에서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과업 범위 확대·보상 부족 등 설계의도 구현 유명무실 “제도 개선 없이 건축물 품질 보장 어려워” “현실 실태 조사해, 현실적 대안 연구해야” 의견
건축 설계자는 설계 단계에서 건축물의 형태, 재료, 색채, 공간 구성을 면밀히 계획하지만, 시공 과정에서 이러한 의도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도입된 ‘설계의도 구현’ 제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어 개선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건축공간연구원은 2015년 ‘설계의도 구현 표준 업무 및 대가기준 마련 연구’를 수행했고, 이를 바탕으로 2020년 ‘공공건축 설계의도 구현 업무수행지침’이 제정됐다. 이후 설계의도 구현 업무에 대한 인식은 점차 확산됐으나, 대가기준은 제도적으로 충분히 뒷받침되지 못해 실무에서는 여전히 적용에 어려움이 있다. 현재 설계의도 구현 업무 대가는 설계비의 8% 또는 실비정액가산방식으로 책정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발주처의 인식 부족으로 인해 설계자가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
특히 설계비의 8%를 기준으로 계약할 경우, 발주처가 과업 범위를 무한히 확대해 과도한 업무를 요구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관계자에 따르면, 실비정액가산방식으로 계약할 경우 발주처가 현장 참여 횟수를 최소화하려 해, 실질적인 설계의도 구현이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법적으로 수의계약 대상이 아님에도 일부 발주처가 법적 근거 미비를 이유로 수의계약 기준(2,000만 원, 여성기업 5,000만 원) 내에 포함시키려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공공건축 설계의도 구현 업무수행지침에 따르면, ‘설계의도 구현’이란 설계자가 건축물의 건축과정에 지속적으로 참여해 공공기관, 시공자, 감리자 등에게 설계의 취지 및 건축물의 시공, 유지·관리에 필요한 사항을 제안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러나 현재 과업지시서에는 ▲시공 과정 전반에 대한 모니터링 ▲모든 주요 현장회의 참석 ▲매번 검토의견서 제출 등이 명시돼 있다. 이에 따라 설계자의 업무 부담이 가중되고 있으며, 정당한 보상 없이 과도한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설계자가 공사감리(건설사업관리자)가 수행해야 할 업무까지 떠맡고 있다는 점이다. 대가 측면에서도 건설사업관리 대가는 설계비의 2.5배를 넘지만, 설계자는 설계비의 8%조차 온전히 보장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로 인해 일부 설계자는 설계의도 구현 자체를 포기하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현장의 혼란을 막고 설계자의 권리를 보장하려면 명확한 대가 기준을 마련하고, 현장의 실태를 면밀히 조사해 현실적인 대안을 연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 건축사는 “설계의도 구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건축물의 품질 저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제도가 실효성을 가지려면 발주처의 인식 개선과 함께 현실적인 대가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건축사는 “설계의도 구현 업무가 법적으로 의무임에도 계약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있으며, 용역비용 산정이 충분치 않은데다 이마저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사례가 많다. 설계자는 설계도서의 미흡한 부분을 보완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설계변경까지 떠맡는 경우도 적지 않다”며 “디자인 관련 사항이 발주처와 시공자의 결정으로 변경되거나, 설계자의 의견이 비용과 일정, 시공성을 이유로 반영되지 않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