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칼럼】 힐튼호텔이 묻는 건축유산의 의미와 우리 시대의 자세
2021년 여름, 남산 힐튼호텔이 부동산자산운용사에 매각되어 용적률이 상향된 복합개발을 위해 전면 철거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힐튼호텔은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설계에서 시공까지 우리의 미적, 기술적 역량으로 세계적인 수준의 성취를 이룬 고도성장기의 기념비이며, 거장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건축형식을 그의 수제자인 김종성이 남산의 환경적 맥락에 맞추어 해석, 적용한 우리 현대건축의 대표작 중 하나다. 이러한 작품이 완공된 지 40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어떠한 사회적, 문화적 협의도 없이 오직 개발의 논리로 철거된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이에 건축계와 문화계는 수차례의 심포지엄, 좌담회, 설계공모와 출간을 통해 이 문제를 공론화했다. 건축유산에 대한 사회적 접근부터 힐튼호텔의 보전을 위한 구체적 계획안까지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었고, 2023년 말 재개발사업 정비계획 변경안의 수립과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의 가결이라는 성과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당시 “힐튼호텔이 가지고 있는 건축사적인 가치를 고려하여 호텔의 메인 로비를 원형 보존하고 새롭게 활용”한다는 서울시의 발표는 이 문제에 대한 공공기관의 첫 공식 반응이었으며, 한국건축단체연합(FIKA)은 의견서를 통해 여전히 남는 의문점과 함께 대안을 제시하며 논의를 이어갔다. 의견서를 관련 주체들에게 검토하도록 요청했다는 서울시의 회신은 일면 개선책을 기대하게 했지만, 1년여가 지난 작년 말 서울시의 사업시행 계획인가를 받은 최종 설계안은 그저 최소의 조치는 취했다는 면피에 머무른 인상을 준다.
건축유산과 관련된 법적 보호 테두리는 항상 제한적
그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의 보전이
한 시대·사회의 문화적, 행정적 역량
힐튼호텔 기억 제대로 이어가는 문제가 오늘날 중요한 이유
역사의 토대 위에서 도시의 미래를 계획하는 것이 보편적인 가치로 자리 잡은 시대다. 세계 도시들은 개발과 보전의 균형을 통해 정체성과 경쟁력을 확보해 가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무조건적 개발에서 벗어나 시대와 지역의 흔적들을 남기고자 하는 노력들이 정부와 민간 기업, 시민사회 등 다양한 주체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보전의 목적에 기반한 섬세한 접근과 방법론이다. 건축이 시간의 흐름을 통해 축적한 장소성과 시민들의 기억을 이어 감으로써 고유하고 지속성 있는 정주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보전의 근본적인 목적이며, 그렇기에 건물이나 그 일부의 단순한 물리적 존치를 넘어 새로운 시대와 상황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공간적, 시간적 맥락을 섬세하게 조율하는 것이 중요하다. 에리크 군나르 아스플룬드의 예테보리 법원, 페터 줌터의 콜룸바미술관, 조성룡의 잠실 5단지 재건축 국제 설계공모 당선작, OMA의 일리노이 공과대학교 맥코믹센터 등 국내외 선례는 기존 건물 혹은 그 부분이 새로운 전체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유효하게 작동할 수 있음을, 그리고 이를 통해 건축과 도시에 역사와 문화의 깊이를 더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기둥, 계단과 같은 요소들이 자리를 옮겨 천창도 없이 땅에 묻힌 힐튼 로비의 계획은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서 생명력을 이어가기보다는 박제된 박물관 유품에 가까워보인다.
유산의 철거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불가역적 결정이다. 특히 힐튼호텔과 같이 사각지대에 놓인 현대의 유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어진 지 50년 이상이 되는 건물은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이러한 연한에 이르지 못한 현대 건축물은 그 사회적, 문화적 가치와 무관하게 상업적 이익을 최대화하려는 시장의 논리에 방치되어 있으며, 산업, 상업시설인 경우 더더욱 그러하다. 법적 보호의 테두리는 항상 제한적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으며, 그 외부에 존재하는 수많은 유산을 지켜 내고 현재화하는 것이 시대와 사회의 문화적, 행정적 역량이다. 우리는 무엇을 건설했는지뿐 아니라 무엇을 파괴했는지를 통해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