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보는 세상] 거식

2025-02-25     함성호 시인

거식

- 장무령

누군가 테이블 앞에서 문득 일어났다
나는 보지 못했다
나의 입술은 거머리처럼 테이블에 붙어 있었다
‘잘 가’라는 말보다 테이블은 정갈하고 달콤했다
묵은 때처럼 침이 흘러 나왔다

젖은 산책로에는 나대신 지렁이가 기어 다녔다

새로 내린 커피에 각설탕처럼 손목이 녹아 내렸다

입속엔 혀를 흉내 낸 혀가 있다
식당 입구를 열면 거미가 내려왔다
테이블에 앉아 음식 리스트를 읽는다
거미줄에 감긴 식욕이 거미를 기다린다


- 장무령 시집 ‘모르는 입술’ 중에서/ 청색종이/ 2024년

정신분석학적으로 거식증은 음식물을 거부하는 행동이라기보다는 음식보다 더 근본적인 것을, 오직 그것만을 먹겠다는 무의식의 고집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중세의 금욕주의자 여성들은 성체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먹지 않아서 힘없이 늘어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왕성하게 신을 위한 활동을 했다. 그녀들은 더 말라갔고, 사람들은 그 모습을 성스럽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시선들을 느끼며 그녀들은 자신의 마른 몸이 더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한 증거였다. 그런 의미에서 거식증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진실한 만찬을 위해 현실의 만찬을 거부하는 증상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