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령에 울려 퍼진 ‘오마주 투 바흐’
해마다 여름이면 해발 700m 고지 대관령에서는 국내외 최정상급 연주자들이 펼치는 대관령국제음악제가 열린다. 청록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그곳에서 음악을 만나고, 연주자들을 만나고, 그들을 통해 저 먼 옛날 작곡가들과 만나게 되는 시간은 정말 멋진 일이다. 매년 주제를 달리하는 음악제를 즐기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길을 떠난 지가 벌써 칠 년째가 되었다.
올해 티켓 박스 오픈에 맞춰 일찌감치 예약한 공연 중 하나는 ‘오마주 투 바흐’ 다. 좀처럼 한 자리에 모이기 어려운 첼로의 세 거장 게리 호프만, 다비드 게링가스, 그리고 지안 왕을 만날 수 있고, 그들이 연주하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3번, 5번, 6번을 들을 수 있어 가장 기대되는 공연이었다. 바흐의 메신저로 나선 세 명의 첼리스트들은 각자의 색깔로 해석한 바흐를 선보였다. 의자 하나 덩그러니 놓인 무대에 등장한 연주자들, 그들이 바흐에게 경의를 보내며 만들어낸 현의 공명은 그야말로 ‘평온한 숭고함’ 그 자체였다.
그들이 연주한 바흐의 ‘여섯 개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에는 두 예술가의 위대한 만남이 들어있다. 바흐의 죽음과 함께 세상에 잊혀졌다 200년 후 한 소년에 의해 다시 생명을 얻게 된 모음곡. 그 소년이 바로 스페인 카탈루냐 출신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다. 1889년 바르셀로나 한 고서점에서 우연히 이 악보를 발견한 13세의 어린 파블로 카잘스는 이후 수십 년에 걸친 연구와 연습 끝에 1948년 마침내 음악사에 길이 남을 명반을 세상에 내놓는다. 96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하루도 손에서 이 모음곡들을 놓지 않고 보완하며 연습했다고 하니, “범인만이 인내를 모른다. 위대한 인간은 기다릴 줄 안다”라고 말한 그의 좌우명에 고개가 숙여진다.
우연한 만남을 위대한 만남으로 만든 카잘스의 인내와 열정!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을 때마다 파블로 카잘스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파블로 카잘스에게 영감을 받아 감동적인 작품을 만든 작가가 있다. 그가 바로 인물 사진의 거장 유섭 카쉬다. 1954년 유섭 카쉬는 파블로 카잘스를 만나기 위해 프라드에 위치한 쿡사 수도원으로 향한다. 프랑코 정권에 대항하다 프랑스로 망명한 세계적인 첼리스트를 수도원의 조용하고 어두운 방에서 마주한 그는 아무런 연출 없이 촬영하기로 마음먹는다. 파블로 카잘스가 평생을 두고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바흐의 곡을 연주하자, 카쉬는 감동한 나머지 잠시 동안 사진 찍는 것을 잊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불현듯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제껏 그리고 이 이후로도 나는 단 한 번도 나를 등지고 있는 사람을 찍은 적이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왠지 이게 맞을 것 같았다. 위로 보이는 창문과 빈 방의 구조가 마치 감옥처럼 보였고, 늙은 예술가의 음악이 창문을 넘어 감옥을 벗어나 전 세계로 울려 퍼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카쉬는 그날을 회상했다.
빛이 새어드는 어두운 방에서 등을 보이며 연주하는 카잘스의 그 유명한 사진은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 이 흑백의 사진 속에는 시대가 낳은 세 명의 예술가, 바흐, 파블로 카잘스, 그리고 유섭 카쉬의 만남이 어우러져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위대한 예술과의 만남은 또 다른 예술을 창조하게 된다.
몇 해 전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인물 사진의 거장 유섭 카쉬전’이 열렸다. 그곳에서 파블로 카잘스의 뒷모습이 담긴 그 사진을 만났다. 평생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방인으로 삶을 마쳐야 했던 그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니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때 전시실에 배경으로 흐르던 음악이 바로 카잘스가 연주하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이었다. 첼로의 고독한 선율이 마치 사진 속의 그가 연주하고 있는 듯해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그 만남 이후 바흐에 대한 나의 오마주는 파블로 카잘스에 대한 그것으로, 그리고 카쉬에 대한 감사함으로 이어진다.
아름다운 만남과 진정한 예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인생이나 예술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의미를 재탄생시키는 과정이라던 지인의 말처럼, 만남을 통해 영감을 주고받으면서 창조와 재창조의 과정이 반복되어지고, 공감과 소통을 이루는 일이야 말로 진정한 예술이 아닐까?
바흐도, 파블로 카잘스도, 유섭 카쉬도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이 남기고 간 영감과 열정이 ‘오마주 투 바흐’의 무대에 섰던 세 명의 첼리스트들에게 투영되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들에게 열렬한 박수와 환호를 보내던 청중들에게로 번져가던 것처럼 말이다.
음악제는 끝났지만 ‘오마주 투 바흐’에서 받은 감동의 여운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 대관령에 울려 퍼진 음악 속에서 만난 바흐, 파블로 카잘스, 그리고 유섭 카쉬가 나에게 만남의 소중함을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