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보는 세상] 눈길

2024-12-10     함성호 시인

눈길

- 박인택

 

지난 여름 이 텃밭에
상치며 무 옥수수 배추 잎들이 무성하였을 때
사람들은 텃밭 둘레를 삐잉 돌아
갈 길을 갔었는데
몇십 년 만의 폭설이라지
길도 밭도 경계도 없는 지금
누가 텃밭을 가로지르며 또박또박
발자국을 만들어 놓았나
누가 입산을 했나?
길이 보인다
뜨거운 여름 땡삐 화사 잡풀 우거진 곳에
겨울 공산이여
또르르 다람쥐 굴러 가는 게 보이고
사람 드나드는 길이 반질반질 나 있듯이
푹푹 찌는 욕망의 아귀지옥 사라진 곳에
문득 經이 펼쳐지듯
 

박인택 시인은 1988년 ‘문학과 사회’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리고 <21세기 전망> 동인을 결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90년 동인지 제1집 ‘떠나는 그대 눈부신 명상입니다’에 참여, 제2집 ‘이탈한 자가 문득’에 참여하고 홀연히 문단을 떠났다. 들리는 바로는 끊임없이 시를 쓰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 2017년 필라델피아로 이주했고, 지난 3월 위암과 간암 진단을 받고 10월에 사망했다. 내가 본 박인택 시인은 조용하지만 호기심이 많은 눈빛이었고 시에 대한 열정이 갈무리된 몸이었다. 언제든지 내 앞에 시의 비수 몇 개쯤은 날릴법한, 그러나 불편하지 않은 수줍음으로 얌전했던 그가 단 한 권의 시집도 남기지 않고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