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답사수첩] 절벽 위의 암자, 산청 정취암(淨趣庵)
경남 산청군 산청읍에서 동남쪽으로 약 10km를 가면 대성산이 있다. 상서로운 기운이 가히 금강에 버금간다고 하여 예부터 소금강(小金剛)이라 불리었다. 이 산의 중턱 기암절벽에 기대어 둥지를 튼 암자가 정취암이다. 해인사 말사인 정취암은 전각이 많지 않은 작은 절이지만, 절 앞으로 펼쳐지는 산천 풍경이 일품이다. 대성산 절벽에 자리한 정취암은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정취암 탱화가 유명한 절이다.
정취암 이야기
신라 문무왕 6년(686년)에 동해에서 아미타불이 솟아올라 한 줄기는 금강산을 비추고 또 한 줄기는 대성산을 비추었다. 이때 의상대사는 두 빛을 쫓아 금강산에는 원통암을 짓고 대성산에는 정취암을 건립했다. 정취암 북쪽 약 4㎞ 정도 떨어진 곳에 율곡사가 있는데 율곡사는 원효대사가 651년에 창건했다. 30여 년 차이를 두고 창건된 두 절에는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에 관한 신비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율곡사에 거처하던 원효대사가 보리죽을 먹고 있는데 정취암에 있던 의상조사는 하늘에서 내려 준 공양을 받고 있었다. 하루는 원효대사가 정취암으로 놀러 왔는데 점심시간이 되어 “오늘 나도 천공(하늘에서 준 점심 공양)을 받아 함께 먹을 수 있겠네”라고 하면서 점심 공양을 기다리는 데 때가 지나도 하늘에서 천녀(天女)가 내려오지 않자 원효대사는 그냥 돌아갔다.
원효대사가 돌아가자 그때 서야 천녀가 내려왔다. 의상조사가 “왜 이제 오냐”고 묻자 천녀는 “원효대사를 옹위하는 팔부신장이 길을 가로막아서 정취암으로 올 수가 없었다”고 대답했다. 이에 의상조사는 자신의 도량이 원효대사에게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 그다음부터 천공을 사양했다고 전해진다.
정취암은 정취관음보살상을 본존불로 봉안하고 있는 한국 유일의 사찰이다. 신라 헌강왕 2년(858년) 굴산 범일선사가 낙산사에 봉안했던 정취관음보살상을 고려 고종 41년(1254년)에 명주성이 몽고병에 함락될 때 야별초 10인과 사노인 걸승이 땅속에 묻어 난을 무사히 피하게 되었다. 그 후 기림사 주지스님 각유선사가 이 정취보살상은 국가의 신보이니 궁궐에 모실 것을 왕에게 아뢰어 왕의 명을 받아 궁궐에 모시게 되었다. 고려 공민왕 3년(1354년)에 화경, 경신 두 거사가 정취사를 중건한 후 궁궐에 봉안되어 있던 정취보살상을 정취사로 옮겨 봉안하게 되었다.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조선 중기의 기록에는 정취사로, 조선 후기에서 구한말 사이에 조성된 불화에는 정취암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말에는 공민왕의 개혁 의지를 실현하고 원나라와 명나라의 간섭을 극복하려는 개혁 세력의 주요 거점이었고, 현대에 와서는 조계종 종정을 지낸 고암 대종사와 성철 대종사가 주석했다.
기암절벽에 매달린 암자
깎아지른 바위 절벽, 발 디딜 곳 없을 것 같은 곳에 암자가 있다. 바위와 어울린 나무들이 푸르게 빛나는 그곳, 정취암이다.
바위 절벽 좁은 공간에 자리한 정취암은 기암절벽과 어우러진 숲에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왕대와 노송 기암절벽이 어우러진 풍경에 소담한 사찰이 놓여 있다. 관세음보살상을 봉안한 원통보전에는 정취관세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원통보전 뒤로 난 돌계단을 오르면 왼편에 응진전, 오른편에 산신각이 나온다. 산신각은 우리나라 절 특유의 전각으로 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일러주는 좋은 예이다. 산신은 우리나라의 토속신앙으로 불교가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수용되었다.
정취암 마당에 서면 푸른 숲의 바다를 볼 수 있다. 간절한 기도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관음보살의 마음이 그 풍경에도 깃들었나 보다. 일망무제의 풍경을 바라보는 여행자의 마음이 정갈해진다. 숲의 바다에 길 하나가 구불거리며 흐른다. 숲과 길이 어울려 한가로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
출처 : 정취암 홈페이지
주소 : 경상남도 산청군 신등면 둔철산로 675-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