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보는 세상] 한강 시집 표 4에 실린 글

2024-10-24     함성호 시인

한강 시집 표 4에 실린 글

- 한강

전철 4호선,
손바위역과 남태령역 사이에
전력 공급이 끊어지는 구간이 있다.
숫자를 세어 시간을 재보았다.
십이 초나 십삼 초.
그 사이 객실 천장의 조명은 꺼지고
낮은 조도의 등들이 드문드문
비상전력으로 밝혀진다.
책을 계속 읽을 수 없을 만큼 어두워
나는 고개를 든다.
맞은편에 웅크려 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갑자기 파리해 보인다.
기대지 말라는 표지가 붙은 문에 기대선 청년은 위태로워 보인다.
어둡다.
우리가 이렇게 어두웠었나.
덜컹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
맹렬하던 전철의 속력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
가속도만으로 레일 위를 미끄러지고 있다.
확연히 느려졌다고 느낀 순간,
일제히 조명이 들어온다, 다시 맹렬하게 덜컹거린다. 갑자기 누구도 파리해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나는 건너온 것일까?

- 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표 4 글/ 문학과지성사/ 2013년

이 글은 소설가로 더 잘 알려진 한강의 시집 표 4, 즉 뒤표지에 실린 글이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오는 시집에는 시인의 산문이 표 4에 실린다. 한강은 한 편의 시적 상황을 적었다. 노벨문학상 수상 평에서도 언급되었지만 한강의 소설에서는 시적인 산문이 빛났다는 게 중평이다. 보르헤스는 직선의 미로를 얘기한 적이 있다. 시인은 지하철 4호선을 타고 가다 문득 정전으로 인한 공간의 전이를 경험하고 지나가고, 건너온 것들을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