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보는 세상] 病

2024-09-25     함성호 시인

- 기형도

내 얼굴이 한 폭 낮 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主語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 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중에서/ 문학과지성사/ 1989년

기형도는 한 권의 시집을 남겼다. 첫 시집이 마지막 시집이었던 만큼, 선배 시인들의 영향도 보이고, 어설프게 차용한 제스처도 있다. 더 써야 하는데 마친 시도 있고 너무 설레발이 긴 시도 있다. 그러나 그의 시에는 일관되게 윤동주적인 부끄러움이 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을 기형도는 포장하거나 감추려 하지 않았다. 거기에 과장이 있는 것은 더 나아가기 위한 안간힘이었을 것이다. 일단 저질러 놓고 보자는 솔직함과 유치함. 기형도의 시가 사랑받는 이유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