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보는 세상] 식구
2024-08-12 함성호 시인
식구
- 구광본
늦은 밤에 모여 앉았습니다
수박이 하나 놓여 있고요
어둠속에서 뒤척이는 잎사귀,
잠 못드는 우리 영혼입니다
발갛게 익은 속살을 베어물 때마다
흰 이빨이 무거워지는 여름밤
얼마나 세월이 더 흘러야할까요
넓고 둥근 잎사귀들이 퍼져나가
다시 뿌리의 상처를 어루만질 때까지는요
오랜 헤어짐을 위하여
둥글게 모여 앉은 이 자들이
아버지, 바로 당신의 식구들입니다
- 구광본 시집 ‘강’ 중에서/ 민음사/ 1987년
1987년은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한 해였지만 나에겐 우리 식구가 해체된 해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즈음에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며 이 시가 나에게 왔다. 수박을 앞에 놓고 둘러앉은 가족의 풍경 속에서 이빨이 무거워지는 이 예감. 그 예감대로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것이다. 그것을 모두 알고 있듯이 다시 뿌리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날은 오지 않는다. 그런데 왜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일까? 아버지는 우리와 같이 흩어질 것이다. 이 시에 어머니가 나오지 않는 것이 증명하는 것.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