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보는 세상] 박스리어카 장씨 ― 꽃피는 백골

2024-07-11     함성호 시인

박스리어카 장씨 - 꽃피는 백골

- 정병근

그는 사랑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사랑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숱한 고비를 넘고 허기를 끄면서 그냥 살았다. 죽은 아내에게도 평생 그 말을 해 주지 않았다. 감은 문의 장막에 과거의 장면들이 스쳤다. 식민지와 육이오와 보릿고개가 지나갔다. 4.19와 5.16과 고속도로가 지나갔다. 부모형제도 지나갔다. 자식들도 지나갔다. 울면서 아내도 지나갔다. 그는 점점 혼자가 되었다. 그는 혼자인 것에 상심하다 분노하다가 잠꼬대처럼 울컥 뭐라고 내뱉었다. ‘이놈들아’인지 ‘야야야’인지 귀조차 가물가물했다. 듣는 이 없이 쇠잔한 그는 이윽고 남은 숨을 거두었다. 한줄기 눈물이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초개의 생을 마감하는 이슬방울이었다. 그는 가장 평화롭게 몸을 놓았다. 그는 말 대신 긴 냄새로 사랑을 피웠다. 녹아내린 몸이 장판을 타고 번지다가 번지다가 천천히 말랐다. 봄이 왔다. 문이 열렸고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목련꽃이 뒤늦은 시취를 풍겼다. 아홉 시 뉴스에 그의 죽음이 불려 나왔다.

- 정병근 시집 ‘우리동네 아저씨들’ 중에서/ 사유악부/ 2024년

어느 때부터인가 ‘고독사’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 흘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고독하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겠는가? 추사는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최고가는 좋은 모임이란 부부와 아들딸과 손자가 모여있는 풍경)”이라고 했지만 죽음은 그 누구도 같이 할 수 없다. 이 시는 그렇지 않느냐고 묻는 듯, 혼자 죽어 가는 노인의 모습을 마치 꽃이 지는 모습을 바라보듯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시취를 사랑의 냄새로 그리고 있다. 그래서 더 애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