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보는 세상]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을까
2024-04-11 함성호 시인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을까
- 채상우
이미 시작되었다 그것은
시작되자마자 사라지고 있다 그것은
사라지면서 시작되고자 한다
몰래 피어나 버린 꽃처럼 흘러오고
흘러가는 강물처럼
시작되면서 사라지고 있다
전격적으로 매일매일
사라지면서 시작되려 한다 그것은
너에게도 죽을 마음이 남아 있는가
나무가 제 그림자 속에 뼈를 감추듯
사라지면서 시작되고 있는
- 채상우 시집 ‘리튬’ 중에서 / 천년의 시작/ 2013년
우리는 종종 사랑하는 대상과 사랑이 하나였다고 주장한다. 그로 말미암아 내 사랑은 그 사람을 잃는 순간 텅 비어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나는 그이/그녀를 잃어버려서 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는 것이다.”고 진단한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과 사랑이 분리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때에야 사랑은 이별 뒤에도 온전히 내 것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라지면서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