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방정식

2013-05-16     정민승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벌써 10년 전이다.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내기로 했다고 하자, 사람들은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대안학교를 다니면서 즐겁게 생활하는 건 너무 좋죠. 그런데 그렇게 물렁하게 커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게 좀 걱정되지 않나요?”
사실 그랬다. 입시경쟁은 물론이고 직장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도 들었다. 아이가 지나치게 내성적이지만 않았다면, 어쩌면 대안학교를 보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고민 끝에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냈고, 이제 그 아이가 대학 4학년이 되었다. 어제, 오랜만에 동창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그 질문을 받았다. “대안학교 보내면 애들이 너무 물러지는 거 아니니? 사회생활은 잘 될까?” 나는, 내 친구들은, 우리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중고등학교에서 여유 있게 살면 사회의 부적응자가 될 것이라는 일종의 공포를 가지고 있었던 걸까.
우리세대의 과거를 떠올려보았다. 그래, 아마 우리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일 거다. 학교에서 억울하고 분한 일이 생기고, 교사의 폭력이나 아이들의 따돌림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자조하면서 참아냈을 것이다. “억울하면 출세해라, 출세해서 변화시켜라.” 학교에서의 고통이 사회의 생존경쟁으로 정당화되었기 때문에, 우리 어른들은 자연스럽게 “사회에서 잘 살기 위해서는 학교에서 더 강하게 인내해야한다”는 등식을 설립시켰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음은 무기나 도구라는 메타포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마음도 담금질하는 그 고통을 반복해야 보다 단단해지고, 더 잘 살 수 있다는 거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잠시만 생각해봐도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입시경쟁에 내몰리면, 마음은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를 잃는다. 따돌림을 당하면, 마음은 두려움에 위축된다. 고통과 인내를 통해 마음이 단단해지면, 마음을 나눌 여지는 줄어든다. 지력과 이해타산만 창궐하게 되는 거다.
그러니까 어린 시절에의 고통을 강인하게 버텨내야 한다는 것은 입시를 그대로 온존시키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인 셈이다. 어릴 때의 고통은 마음 밑바닥에 침잠되어 있다가 중년기에 우울증이나 편집증, 가학이나 투사 등으로 뒷통수를 치게 마련이다. 우리 사회에 소위 ‘갑질’이나 성희롱, 폭력이 사회에 만연한 것은 그것을 정당화하는 학교문화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사(校舍)도 마찬가지이다. 교문은 정시에 닫히고 쪽문이 개방되며, 교실은 사각의 반으로 구획되어 있다. 일제식 수업에, 아이들이 서로를 드러낼 수 있는 원형 책상배치도 찾을 수 없다. ‘포스트모던’의 ‘지식기반사회’라는데, 아이들은 근대적 원형감옥형 학교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딸아이와 같이 졸업한 아이들 중에는 지방대로 간 아이도, 또 대학을 가지 않은 아이도 있었지만, 경쟁적인 사회에 부적응해서 우울증에 빠졌다거나 오타쿠가 된 아이는 없었다. 그나마 학교의 문화가 조금은 마음 밭을 가꾸려 노력했기 때문일 거다. 어제, 딸아이에게 일반 고등학교 아이들과 대안학교 아이들이 어떻게 다르냐고 물어보았다. 아이의 대답은 이랬다. “일반 고등학교 졸업한 애들은 공부를 잘하는 아이덴티티가 제일 중요하고, 아니, 그게 거의 다라고 할 수 있고, 대안학교 졸업한 애들은 공부 잘한다는 건 자신의 여러 특징 중의 하나로 생각하고 그런 것 같애.”
10년. 강산도 변한다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어렴풋하게 마음을 키운다는 의미를 알아가고 있다. 좀 슬프고 좀 부끄럽다. 관심을 갖되 개입하지 말기. 마음이 놀고 클 수 있도록 기다려주기. 쉽지 않지만 방향은 분명하지 않은가. 아, 오늘은 바위에 눌려있던 내 마음의 식물을 잘 살펴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