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퍼 울트라 을(乙) 광고쟁이의 짧은 광고뒷담화
#에피소드 1
20년쯤 전 우리나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구두회사 TV-CM을 만들어 사장님께 시사를 했다. 잘 생긴 모델이 정장에 멋진 선글라스, 매끈한 구두를 신고 품격 있게 걸어가는 동영상이었다. 사장님 이하 모든 임원들이 박수를 칠 만큼 제작물을 마음에 들어 하셨다. 잘 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신 사장님, 나가다 말고 덧붙인 한 마디!
“아주 좋아요. 근데 저 모델 선글라스만 벗기면 더 좋겠어. 선글라스 벗는 거 어렵지 않지?”
그 한 마디에 광고는 재촬영. 사장님은 재촬영해야 한다는 개념조차 없으신데 누구도 그 앞에서 안 된다는 소리를 하지 못했다. 시사까지 잘 끝내고서 재촬영을 했던 웃지 못 할 이야기.
#에피소드 2
지금도 잘 팔리는 캔커피 광고에도 재촬영의 쓰라린 기억이 있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편의점 앞에 미끄러지듯 와서 서는 승용차. 여자 모델이 뛰어 내려 캔커피를 산 뒤 다시 차에 타서 그 온기를 나누어 마신다. 이 로맨틱한 스토리를 위해 꽤 유명한 여자 탤런트가 캐스팅 되었고, 살수차가 동원되어 촬영은 일사천리∼ 제작물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광고주 시사에서 난리가 났다. 음료광고에 비가 내리는 것은 금기라는 것이다. 제작에 들어가기 전에 광고주 실무자는 물론 담당 임원에게도 미리 결재를 받은 아이디어였는데 다 찍은 뒤에 그런 소리를 하다니···
힘없는 을은 ‘담당 임원이 괜찮다고 했대요.’ 같은 말은 뻥끗도 못하고 모델까지 교체해서 재촬영을 해야 했다.
#에피소드 3
자동차광고 촬영은 해외에서 하는 경우가 많다. 몇 년 전 유명한 자동차회사에서 신모델이 나왔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선호하는 색깔인 검정색 자동차를 풍광 좋은 해외로 가지고 나가 멋진 제작물을 촬영해왔다.
광고주 시사도 그림이 잘 나왔다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끝났다, 아니 끝나는 듯 했다. 그런데 광고주 높으신 분의 한 말씀이 모든 분위기를 반전으로 몰고 갔다.
“다 좋은데 차 색깔이 왜 저래요? 유럽에서 젤 인기 있는 색은 빨강인데··· 우리도 빨강으로 합시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꼬박 48시간 편집실 두 개를 통째로 붙잡아서 한 프레임씩 세워놓고 차 색깔을 바꾸는 CG작업을 해야 했다. CG비용만 2억여 원.
#에피소드 4
15초 광고를 시사할 때는 반복해서 2∼3번 보여줄 수 있도록 세팅을 해서 간다. 한 번 보고는 기억을 잘 못하기 때문이다. 어느 식품회사 광고의 시사회장. 똑같은 15초 광고를 3번 보여드렸다. 한참을 생각하시던 광고주 사장님.
“저거 두 번째 것이 젤 낫네. B안으로 틉시다!”
셋 다 똑같은 광고였다는 사실은 아무도 말씀 드리지 않았다.
길어야 30초 대부분은 15초에 끝나고 마는 TV광고. 그 15초를 위해 100명 가까운 스텝들이 머리를 짜내고 밤을 세우고 수억에서 수십억까지 돈을 들인다. 그런데 광고제작물의 운명을 좌지우지 하는 슈퍼 갑은 광고주 회사의 사장님 또는 오너의 2세인 임원님. 그 분들 한마디에 완성된 제작물이 폐기되거나 재촬영 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이런 일들을 겪다 보면 광고의 첫 번째 타겟은 물건을 사 줄 소비자가 아니라 광고주라는 현실을 깨닫게 된다. 당연하지만 씁쓸한 현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광고쟁이들이 이 시간에도 소비자를 사로잡을 아이디어를 찾아 우주만큼의 고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