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근대건축사 산책(8) - 토착 낭만신화 깃든 「북구 고전주의」의 우아함

군너 아스플룬트의 ‘우드랜드 채플’(1918~20)

2013-01-01     김현섭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부교수

북유럽 근대건축의 움직임 가운데 1920년을 전후하여 고전주의가 부흥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유럽 전체를 개괄컨대, 아르누보 이후 아방가르드 내에서는 추상화의 경향이 대세였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에서는 기능주의(funkis)를 상륙시킨 스톡홀름 박람회(1930) 이전, 건축계의 주도적 인물 대부분이 고전주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이름하여 ‘북구 고전주의(Nordic Classicism)’. 20세기 전반의 이 흐름이 전 세기의 신고전주의와 달랐던 점은 건물의 규모와 규율이 크게 완화되어 보다 온건한 양상을 보인다는 사실에 있다. 이런 특징은 세기의 전환점에 편만했던 민족낭만주의(혹은 국가낭만주의) 경향과도 관계될 수 있다(본 연재물 4회분 참조, 「1900년 전후의 핀란드 민족낭만주의 건축」, 2012.9.16). 고전의 우아함이 낭만의 자유와 토착의 숨결을 만났던 것이다.

데미트리 포피리오스는 이러한 북구 고전주의를 ‘스칸디나비아 도릭주의’ 로 규정한 바 있다(「Scandinavian Doricism」, 1982). 그가 ‘고전주의’보다 좁은 범위의 ‘도릭주의’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의미심장한데, 도릭 오더(Doric Order)가 고전 규범 이전의 시원성(始原性)에 더 근접하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실제의 도릭 오더는 18세기 후반에서야 알려지기 시작했고, 르네상스를 통해 세련된 고전주의에 익숙한 이들에게 이것은 거칠고 투박한 원시의 규범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시원성의 이유가 북구 고전주의를 지역 토착의 전통과 매개하는 근거다. ‘도릭주의의 감수성(Doricist sensibility)’에는 고전과 토착이 공유하는 건축의 원초적 본질인 ‘짓기’와 ‘살기’의 존재론이 내재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토착건축의 구축논리가 전제되며, 그 논리는 신화적 가공을 거쳐 미학적 가치를 획득한다. 한편, 포피리오스가 제기한 고전과 토착의 결합은 알란 콜쿤을 통해 ‘토착 고전주의’라는 약간 다른 관점으로 이어진다(「Vernacular Classicism」, 1984). 위계상으로 고급과 하급을 지시했던 ‘고전’과 ‘토착’을 하나의 개념어로 묶어낸 것은 역설적인데, 18세기 이래 양극적 관념이 탈색되고 토착 예술도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게 되면서 이 모순어법은 성립이 가능해졌다. 여기서 콜쿤은 로지에의 계몽주의적 원시 오두막(1755)을 들며 토착과 원시로의 회귀를 ‘자연법칙의 필요성에 순응하는 보편 언어로서의 건축적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과정을 ‘고전주의의 재토착화(revernacularization of classicism)’로 여겼고, 이것이 ‘기원의 신화를 실체화’한다고 주장한다. 남방 발생의 고전건축이 말 그대로 북방의 토양에 ‘재토착화’됐다는 점과 북구 고전주의의 단순성이 실체화된 ‘기원의 신화’를 되묻게 됨을 생각할 때, 콜쿤의 개념 역시 20세기 초 스칸디나비아의 상황에 적용할 만하다. 재토착화된 고전주의 건축물 가운데서도 도릭주의의 감수성을 가장 진하게 발산하는 사례로 스웨덴의 군너 아스플룬트(Gunnar Asplund, 1885~1940)가 설계한 우드랜드 채플(Woodland Chapel, 1918~20)을 들 수 있다. 당대 북유럽의 흐름을 대변하듯 아스플룬트 역시 민족낭만주의, 고전주의, 기능주의의 단계를 거치는데, 이 작품은 그의 고전주의 시기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북구 고전주의 전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 우드랜드 채플의 외관 (Courtesy of Peter Blundell Jones) ⓒ김현섭
▲ 우드랜드 채플의 실내 공간 (Courtesy of Peter Blundell Jones) ⓒ김현섭

스톡홀름 우드랜드 공동묘지(1915~61)의 침엽수림에 자리한 이 ‘숲속 예배당’은 우선 그 아담한 크기(전체 높이는 8m에 이르나 지붕을 제외한 포티코는 약 2.3m)로부터 자연에 순응하려는 겸허함을 볼 수 있다. 또한 큰 구배의 우진각지붕, 정면의 도릭 기둥 포티코,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내는 피라미드형 정면 파사드가 첫인상을 좌우한다. 파사드는 고전건축의 페디먼트를 암시하기도 하고, 건축의 원형(archetype)에 대한 향수도 불러일으키는데, 매듭 없는 지붕 매스는 기하학적 순도가 높다. 그러나 직접적으로는 아스플룬트가 참조했던 덴마크 리젤룬트의 토착농가(1792~95)를 연상시키며, 지붕의 나무널 역시 토착성을 발현한다. 포티코의 목재 도릭 기둥은 주초와 플루팅 없이 얇은 주두만을 갖는 단순한 형식으로, 고전 규범 이전의 원초적 단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석재의 바닥패턴으로 이어지는 실내는 외부와 완전히 다른 세계다. 외부 이미지가 토착의 투박한 맛을 간직했다면 내부는 정제된 고전의 우아함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 우드랜드 채플의 입면, 평면, 단면

사각형 평면의 실내 공간은 백색의 돔으로 지배되며, 포티코에서 그렇듯 어떠한 수평돌림띠 없이 바로 기둥에 의해 지지된다. 미끈한 플라스터 마감이 거칠게 처리된 바깥의 지붕과 대비되고, 내부의 도릭 기둥은 플루팅과 주두의 조각, 바닥의 돌림띠가 도색되어 외부의 원시적 사촌들보다 더 진화된 듯한 환상을 갖게 한다. 실내는 돔 정점의 둥근 천창이 밝히는데, 전체 구도가 로마의 판테온과 닮았지만 규모의 친밀성과 마감의 온건함으로 긴장감은 훨씬 이완된다.하지만 우드랜드 채플의 실내에서는 전제됐던 토착건축의 구축논리가 모호해진다. 특히 돔은 하중이 전달되는 방식을 적절히 드러내고 있지 않은데, 부드러운 백색 곡면과 천창에서 유입되는 빛은 서로 어우러져 그 구조와 공간의 물성마저 소거해버린다. 단면도에서 알 수 있듯, 실제로 이 반구(半球)는 지붕의 목조체계에 매달리는 형국이다. 분명 아스플룬트는 구축의 논리보다 지붕과 돔의 원초적 이미지를 우선시했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모순이 해결되려면 신화의 개입이 필요하다. ‘석화된 목구조(petrified carpentry)’로도 설명되는 그리스 고전건축이 구축의 논리에 미학적, 혹은 신화적 가공을 덧입었음을 상기하자.) 여기서 신화란 구조와 기능의 현실적 문제를 뛰어넘어 무목적의 가치마저도 창출하는 (그러나 칸트적 견해에서는 무목적의 목적을 지니는) 미학적이고 시적인 힘이라 하겠다. 이는 땅의 혼을 섭취한 쉘터가 품는 거주의 존재론적 신화로서 건축의 기원에 관한 신화를 환기시키기도 한다. 더불어 이 채플의 존재 근거인 죽음과의 대면을 생각해보라. 망자를 애도하며 떠나보내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이 공간은 부활에 대한 소망이 움트는 기독교적 신화이자 실화의 장이다. 이러한 신화적 가공이야말로 우드랜드 채플을 현실적 속박에 가두지 않으며, 천상의 시를 꿈꿀만한 기념비로 상승시킨다. 그리고 이를 재토착화된 고전이자 전설로 남게 한다. 우드랜드 채플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울림을 주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