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근대건축사 산책(10) - 리트벨트의 슈뢰더하우스(Schr?der’s house, 1923-1924): 가구처럼 만든 집 그래서 자유로웠던 집
MVRDV와 렘 콜하스, 현상을 보는 새로운 틀인 데이터 스케이프(Data-scape)를 가지고 나왔고 수직으로 적층된 수평면들의 개념을 흔들어버린 아키텍트들이다. 땅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생사가 갈렸던 지면이 낮은 나라의 특성을 고려하면 이들의 방법은 그 지역에서는 지극이 상식적이다. 국토의 많은 부분을 간척해서 만들었으니 대지에 물리적, 문화적 맥락이 많을 리 없어 대지와 관련된 각종 엄격한 법규와 프로그램이 중요한 설계 요소가 되었을 것이고 어차피 대지레벨이라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아 자유롭게 만들고 없애고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땅에 대한 관념이 공고한 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였겠다.
건축에 있어 코드(코드는 법규일 수도 있고 들뢰즈나 라캉의 개념을 끌고 들어온다면 생산기제로서의 욕망을 통제하는 시스템일 수도 있다.)라는 것이 지금 보다는 강하게 존재했을 20세기 초, 감히 그 코드를 삭제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화가 몬드리앙(Piet Mondrian, 1872-1944)과 두스브르흐(Theo van Doesburg, 1888-1931)가 주축이 되어 시작된 네덜란드의 근대예술운동인 데 스타일(De Stijl)이다. 몬드리앙은 회화의 구상적 요소와 상징성(계층, 위계)마저 없애고 싶었다. 상징을 없애서 가치마저 중성화한 보편성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재즈의 기원이라고도 볼 수 있는 무조음악의 창시자 쉔베르그의 영향도 읽을 수 있다.) 자연스럽게 회화는 보다 덜 순수한 3차원에서 좀 더 순수한 2차원으로 환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형태는 사라지고 그저 수와 기본색의 관계만으로 표현되는 회화. 그런데 처음부터 이 둘은 동상이몽을 가지고 있었다. 몬드리앙은 순수 회화운동을 지향했고 두스브르흐는 모든 예술이 융합되고 다양한 주체들이 공동으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공동체 예술운동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국의 예술수공예운동이 20세기 초 근대건축운동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는지 새삼 다시 생각하게 된다.) 화가 출신이었던 두스브르흐의 생각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건축가와의 공동 작업은 필수였다. 이 후 아키텍트 아우드(J.J.P. Oud, 1890-1963)와 잠시 동거하지만 그는 이내 떠
나고 만다. 이유는? 순수 회화와 건축은 동거가 불가하다는 것. 결국 두스브르흐는 바우하우스 강의시절 제자였던 에스테렌(Cornelis van Eesteren, 1897-1988)과 주택연작 연구를 통해 그가 원하던 건축과 몬드리안이론의 통합을 실현하는 것처럼 보였다. 중앙 코어를 중심으로 채색된 면을 포함한 덩어리들이 내부에서 부터 피어나듯 배열되어 정면성을 부정하고 마치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구성으로 물성마저 부인하고 있다. 각각의 덩어리는 단위 공간을 의미하며 이 공간들은 서로 관입하고 병치되어 마치 몬드리앙의 2차원적 보편성을 3차원의 공간으로 풀어낸듯하다. 또한 대부분의 표현도 시점을 강요하는 투시투상도가 아닌 등각투상도 또는 부등각투상도를 사용해 보편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1년 후의 작품은 덩어리의 볼륨을 생략하고 채색된 면만을 남겨 둠으로써 더욱 더 관계성을 강조한다. 내외부의 경계를 허물고 공간들의 순수한 관계성만을 남겨두었다. 여기까지는 일단 명쾌하다. 문제는 이것이 실재세계에서는 어떨 것이냐다. 그 동안 페이퍼 아키텍트였던 두스브르흐는 세상을 뜨기 한 달 전, 자신의 작업실 겸 주택인 뫼동 스투디오(Moudon, 1926-1930)를 설계하여 완공했지만 주택연작에서 보여준 것들을 찾기엔 무리가 있다. 두스브르흐의 주택연작을 재현한 듯한 유일한 건물은 소목장 리트벨트(Gerrit Rietveld, 1888-1964)가 설계한 인테리어디자이너, 슈뢰더부인의 집(Schroder house, 1924)이다. 그러나 이 집은 리트벨트가 두스브르흐의 꿈을 충분히 이해하고 설계한 것으로 보기엔 좀 무리가 있는 듯하다. 채색된 면과 선의 조합된 건물의 외관은 두스브르흐의 주택연작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지만 그것이 발전된 과정을 보면 주택연작에서 보인 개념들과는 사뭇 다르다. 면과 선형부재의 접합방식 그리고 구성을 보면 오히려 개념은 리트벨트의 의자 시리즈에 가깝다. 최초 콘크리트로 구조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자금 부족으로 합판과 벽돌로 지어지는 바람에 더욱 가구처럼 되어버린 느낌이다. 이 집의 설계는 많은 부분 리트벨트와 건축주인 슈뢰더부인의 공동 작업으로 진행되었다. 접이식 벽체로 실의 구획이 자유로운 2층은 건축주가 요구해서 나중에 적용된 개념들이었다. 리트벨트로선 처음 설계해보는 건물이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가구공방사장과 인테리어디자이너가 설계한 집이 된다. 그래서 코드에 대한 강박을 떨쳐 내어버릴 수가 있었을까?
두스브르흐는 이 집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바로 이거야 하고 동의를 했을까 아니면 부인했을까. 자신이 먼저 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을까. 아니면 쓸개를 씹으며 질투하고 있었을까. 역사는 두스브르흐의 뫼동보다 리트벨트의 슈뢰더하우스를 더 많이 기억한다. 그리고 리트벨트가 두스브르흐의 이론들에 충실히 반응을 했던 그렇지 않았던 슈뢰더하우스는 이후의 건축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리트벨트는 이후 제 1회 CIAM 네덜란드대표로 참가하며 네덜란드의 대외적인 대표 아키텍트로 전면에 등장했다. 그는 암스테르담에 반 고흐 박물관을 설계했고 1964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전 델프트 공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