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삶 속에 싹트는 생명력 있는 건축을 위해
어느덧 50대에 진입한 걸 깨달으면서, 동시에 지난날을 돌아보게 된다. 학교 졸업 후 실무 15년, 둘째 출산 후 짧은 전업주부 생활, 그리고 다시 하게 된 일과 얼마 후의 개업…. 그리고 벌써 몇 년이 흘렀다.
주로 도시지역에서 설계업무를 하고 대규모 사무소에서 일을 하다, 비도시 지역에서 1인 건축사사무소로 독립을 하면서 녹록지 않은 여러 일들을 겪었다. 관리 지역에서의 처음 겪어보는 인허가 기준(관리지역, 농림지역)과 소규모 주민 밀착형 업무(?)에 문뜩문뜩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를 떠올리곤 했다.
근래에, 입찰 시도 후 처음으로 낙찰을 받아 교육시설 리모델링 설계를 접하며 공사비·업무량 대비 터무니없이 낮은 설계비 요율에 좌절을 한 일이 있다. 리모델링 설계는 일반설계 업무와 달리 현황 실측 업무가 수반되므로 설계 요율(1.5배)이 더 높아야 마땅한데 교육시설은 아직 그것이 반영되지 않은 듯하다. 담당자에게 쓴소리를 하기도 했으나, 그래도 평소 다른 엄마만큼 아이한테 다 해주지 못하는 나름의 죄책감과, 내 아이가 다닐 수 있는 시설이라는 나름의 책임감으로 힘들지만 최선을 다하고 많은 걸 얻은 작업 과정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개업 초창기의 감리현장은 현장시공의 중요성을 생각하는 본인에게는(현장에 나름 진심인) 다른 업역의 사람들을 설득 시키는 게 쉽지 않았다. 현장에서 그들의 방식으로 작업한 철근배근에 최소한의 산뜻한 수정 방안을 전해 줄 수 없는 구조 지식의 한계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그래도 큰 문제 없이 집이 준공되고 마무리되는 데에 뿌듯함과 아쉬움이 있었다.
처음 건축사사무소 이름을 정할 때 아이들 이름의 한자인 “희”를 따서 “희망을 담는다”는 의미로 지었는데, 나는 지금 현재 거기에 부합한 작업을 하고 있는지…. 실은 잊고 살 때가 더 많은 게 현실이지만 그래도 가끔씩 그 의미를 떠올리며 초심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여전히 고쳐지지 않는 사투리와 지역에 몇 없는 여성건축사라는 (소심한) 마음에 가끔은 욱하는 성격을 참기도 하고 행동에도 신경이 쓰이지만, 그래도 낯선 이곳에서 이방인으로 이렇게 인연을 이어오며 지금처럼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참으로 신기하기도 하고, 감사하다 생각한다.
지금의 나이와 내가 처한 상황, 세월을 핑계로 늘 하고 싶은 일에 목마름을 가져 보지만 실제 현실은 그렇지 못함에 자책도 하면서, 주어진 운명에 물 흐르는 데로 살아오다 보니 지금의 이 자리에 오게 됐다. 50의 나이에도 아직 방황하며, 좋은 건축을 위해 잘하고 있는 게 맞는지 반문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좋은 건축을 만드는 일은 건축사의 몫이고 소명일 것이다.
끝으로, 이 땅의 모든 이방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원하고 바라는 희망들을 꽃피울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