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건축 설계비 공공 대비 20% 불과, 전체 시장 81% 차지 민간건축 대가기준 마련 시급
K-건축 설계 기반이 무너지고 있다, 건축설계 민간대가기준 마련 절실 과도한 덤핑경쟁으로 설계시장 왜곡 심화 헐값에 ‘건축물 안전’마저 삐걱 “건축품질 확보 측면에서 제도개선 시급”
건축 설계비는 공공의 안전과 부실 설계를 방지하기 위한 비용이다. 더불어 건축사(architect)를 비롯한 수많은 직능인(professional)의 사고와 기술, 그리고 노력에 더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수행되는 지식기반 서비스 비용으로서 건축사뿐만이 아닌 구조·기계·토목·조경 등 건축산업 전후방에 지급되는 대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건축사업 중 공공을 제외한 약 80%가 넘는 민간건축 설계서비스가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인 ‘헐값’에 거래·수행되는 형편이다.
건축사업에서 약 18%에 달하는 공공건축은 ‘공공발주사업에 대한 건축사의 업무범위와 대가기준’에 따라 적정 대가지급이 의무화돼 있지만, 건축시장 대부분이라 할 81%에 해당하는 민간발주사업의 경우엔 덤핑수임과 최저가 낙찰 관행이 부실 설계·감리로 이어지게 하는 구조적 결함으로 작용하고 있다.
낮은 대가로 인한 취약한 노동환경, 이로 인한 건축전공 졸업생들의 설계 기피 현상에 따른 인력 이탈에 더해 건축이 고부가가치산업이라고 하지만 산업 자체가 선진화는커녕 여러 부작용이 심화되며 상처가 곪아 터지는 형국에까지 이르고 있는 게 사태의 심각성을 설명해 준다. 건축물의 품질·안전성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오는 현 민간건축 설계비의 심각한 왜곡현상, 이대로 방치해도 되는 걸까.
▲ 우리나라 건축사업 중
81%에 달하는 민간 설계시장이
대가기준 없이 방치되고 있다
“건축 설계비가 30년 전에 비해 오히려 낮아졌다.”
대다수의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는 건축사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토로하는 하소연이다. 설마 그럴 리가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 민간건축 설계시장 현실이 그렇다. 지난 30년간 모든 상품 가격이 적게는 두 자릿수, 많게는 몇 배까지 올랐지만, 건축 설계비는 제자리는커녕 오히려 뒷걸음질 하고 있는 것이다. 왜일까.
과도한 덤핑경쟁에 따른 폐해 때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건축공사 수주액 비율은 공공이 38조 원, 민간이 172.6조 원으로 각각 약 18%, 81%를 차지한다. 민간건축물 중 93.5%를 1,000제곱미터 이하 소규모건축물이 차지하고 있는 까닭에 국민 실생활과 밀접히 연관돼 있지만, 현재 이 시장이 정확한 대가기준 없이 저가수임에 따른 부실설계 위험에 노출돼 있다. 소규모 건축물 공사현장은 안전사고 빈도도 높을 뿐더러 불법 건축물 양산의 주범으로 꼽힌다. 이러한 배경에 최저가 낙찰 관행에 따른 덤핑 경쟁이 자리잡고 있다. 세움터 통계자료(2015∼2019년)에 따르면 민간건축 설계대가는 공공 대비 20%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민간건축 대가기준이 없다보니 비용절감이 지상 목표가 돼 저가수주 후유증이 복합작용 가세하며, 형편없는 설계비가 민간건축에 더욱 만연해지기 마련이다. 건축설계업을 중심으로 한 건축서비스업 전체가 심각한 타격을 받는 셈인데, 이러한 저가설계는 부실설계로 이어지고 이는 시공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건축물의 성능·품질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국민 안전에도 심각한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게 건축관계자와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 점점 더 값싼 것만 의식이
‘사고 유발’, 산업마저 골병…
과도한 덤핑경쟁→산업종사자·협력사 희생 강요
→서플라이 체인 붕괴→건축물 부실 결과 초래
과도한 덤핑경쟁으로 인한 저가수임 문제는 결국 우리나라 국민의 생활·문화·생산과 전체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건축, 그리고 건축물과 공간 환경을 통해 국민 삶을 책임지는 건축설계분야의 경쟁력을 갉아먹는다. 실제로 현재 민간건축에서의 열악한 현실과 동떨어진 대가로 인해 건축학과 지망생 수, 건축사보 인력이 현저히 감소하고 있는 추세다. 건축의 가치, 창의적 설계 가치를 헐값 취급하는 사회 분위기와 더불어 ‘저가설계→취약한 근무여건’으로 인해 우수한 인재들이 일터를 떠나고 있는 것으로, 이를 해결키 위해서는 보다 근원적인 해법이 필요하다고 건축사와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할까. 우선, 민간건축 설계에 대한 합리적인 대가기준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단독주택 설계를 주로 하는 건축사사무소 관계자는 “건축서비스 수요가 늘어나면서 비용 책정 문제로 건축사사무소와 소비자들 사이에 이견이 발생하는 일이 잦다”며 “대가기준이 없다보니 건축소비자들은 무조건 설계비를 깎으려 들고, 과도한 경쟁으로 인한 덤핑은 산업종사자와 협력사의 희생을 강요해 서플라이 체인의 붕괴를 가져오고, 이는 곧 건축물의 부실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사회적 약자 보호는 물론 건축품질 확보 측면에서도 제도개선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대한건축사협회 관계자는 “건축물의 성능, 품질과 직결된 설계도면의 품질은 건축설계 대가기준과 밀접하다. 건축설계 분야는 공공보다 민간시장이 더 크지만 정작 민간 대가기준이 없는 상황으로 건축물의 안전과 품질 확보를 위해서라도 민간대가기준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