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2022-03-22     함성호 시인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 신석정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 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 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 녹색 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볕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위에는 이제야 저녁 안개가 자욱이 내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 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맛자락이
발길에 스치는 발자욱 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둑을 거쳐서 들려오는 물결 소리도 
차츰차츰 멀어 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을부터 
우리 전원(田園)을 방문하는 까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멀리 가 버린 까닭이겠습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 하는 애기의 잠덧이 있습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이제야 저 숲 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까?

 

- 신석정 시선집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창비시선 / 1990

저녁이 오고 있고, 시인은 그 어둠을 밝히려는 어머니의 시도를 자꾸 저지한다. 그 이유는 지는 해가 섭섭해하기 때문이고, 새들이 아직 푸른 하늘을 날고 있기 때문이고, 이제야 안개가 내려오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 저녁을 계속 지연시키고 싶어한다. 이제 작은 별이 뜨기 때문이다. 신석정 시인은 문훈의 외할아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