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2022-01-05 함성호 시인
빈집
- 정형무
부러진 문살 새로 휘황한 햇살 비쳐
묵은 먼지들 함부로 뛰노누나
송홧가루 후― 불고 툇마루에 걸터앉아
빈집의 삼엄을 들여다본다
난초무늬 요강은 우물가에서 졸고
무너진 바람벽 너머 댓잎이 파르르 떤다
까마중 산딸기 개망초의 진군
인종 매꽃 덩굴손은 어긋난 문살을 노리고
산뽕나무 찢어지도록 뻗어
햇살을 다투는데
그 새를 파고드는 뻐꾸기 소리 뻐국―
한봄의 생명들아 이슥토록 쳐들어오라
빛바랜 거울이 보랏고 선 한평생
빈집이 사그라지며 모다 내어 주리라
- 정형무 시집
‘닭의장풀은 남보라 물봉선은 붉은 보라’
우리詩움 / 2021
새해 벽두시로 뭘 고를까 하다가 건축을 하는 이들에게 이만한 시가 없으리라 생각하고 골랐다. 빈집과 봄의 생명력을 결합해 최대한 메시지를 절제한 효과가 아린 울림을 준다. 흔히 빈집은 그 수명을 다했거나, 살던 이들이 떠난 집이다. 쇠락한 사물 가운데 가장 처연한 꼴이다. 그에 반해 그 빈집의 틈을 노리고 스며드는 자연의 생명력은 얼마나 강인하고, 뜨겁고, 관능적인가? 사람이 문을 열 일이 없자 덩굴손이 문을 여는 이 봄. 그 봄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