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사님, 저랑 ‘게임’ 한 번 해보시겠습니까?”

2021-12-17     김경훈 건축사 · (주)에이치에스플랜 건축사사무소
김경훈 건축사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넷플릭스 ‘오징어게임’에 나온 대사에서 ‘선생님’을 ‘건축사’로 호칭을 바꾸었는데 그럴듯하게 다가온다.
 ‘경기’와 ‘게임’의 차이가 궁금해진다. 건축설계 ‘공모전’은 건축설계 ‘경기’라고도 하지만 상당수(좋은 심사경험도 있지만, 조달청·LH·교육청을 포함한 상당수 설계공모)가 ‘게임’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건축설계 ‘게임’으로 명명하기엔 매우 어색한 단어 조합이지만 필자가 개업 후 참여했던 공모전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경기’라기 보다 ‘게임’이라 할 수 있는 상황들이 적지 않다. 필자가 그런 류에 많이 참여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런 류는 왜, 얼마나,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게임’의 법칙 _ 온라인게임을 하는 이들은 ‘현질’(과금 : 온라인 게임 아이템을 현금으로 구매하는 행위) 유저와 ‘무과금’(게임에 돈을 쓰지 않음) 유저로 양분된다. 무과금 유저가 현질 유저보다 높은 랭크를 차지하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최상위 랭커들의 대부분은 현질 유저들이다. 건축설계 ‘게임’에서도 당선작과 2등 때론 3등까지 현질 유저들이다. 이 경우 심사위원 명단, 참여 회사명, 설계비만으로 참여하지 않은 현질유저들은 이들의 현질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심사위원 ‘아이템’을 많이 구매한 순으로 순위가 정해지며 설계비의 10∼15%가 아이템 구매 비용이다. 이 아이템은 구매 가능 여부, 구매 방식(선불 또는 후불), 사용기간(다음 게임에 사용 또는 장기적인 사용 권한을 부여받고 우선권이 주어짐) 등의 옵션이 있다. 스페셜 아이템으로 ‘폭탄’ 던지기 아이템은 고가인데 당선 가능 작품을 초반에 떨어뜨리거나, 최종 심사에서 밀어내기에 매우 유용하다.

공정의 기준_ 빈 페트병과 비닐이 떠 있는 강은 깨끗한 강인가? 우리 사회는 어느 수준의 강을 깨끗한 강으로 보고 있을까?
많은 맑은 물이 산 곳곳에서 흘러 강을 이룬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강에는 폐수가 보이고 기름이 보이기도 한다. 분명 저 위에서는 맑은 물이 흘러 들어오고 있는데 말이다. 어디엔가 오염된 근원지가 있다.

건축설계 게임 유저들의 레벨은 다음과 같다.
레벨 1. “공모전 시작부터 작업이 돼야죠. (된 겁니다.) 판을 짜야 합니다.” / 레벨 2. “15%니까 1인당 3%씩 다섯 명 잡으면 됩니다. 배팅하시죠.” / 레벨 3. “어느 분 잡을 수 있습니까? 심사위원 ○○○교수(○○○건축사) 됩니까?” / 레벨 4. “‘사전 접촉 금지 서약서’는 그냥 하는 겁니다. 안 찾아가면 괘씸하다고 표 안 줍니다.” “그분도 알고 보면 사전에 만나줘요. 뭐라도 들고 가야죠.” / 레벨 5. “교수님, 심사하시는 ○○○공모전 참여할까 합니다. 한 번 봐 주시죠.” / 레벨 6. “심사 결과 나온 후에 연락드려야지. 부담스러워할(하실) 거구, 차라리 계획안 완성도 높이는데 집중하자.” / 레벨 7. 초보자(Beginner) : 공모전 지침에 충실하며 심사위원의 이력을 통해 건축관에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레벨 4 위아래가 현질 유저들일 것이다. 레벨 5, 6은 무과금 플레이어가 주를 이루며, 현질 유저들은 이들을 상위 랭크 경쟁상대로 보지 않는다. 초보자는 레벨 5, 6 조차도 거부한다. 하지만 레벨 업의 유혹은 강하다. 온라인게임에서는 무과금유저들이 유일한 무기인 시간으로 레벨 업을 할 수 있지만(현질 유저들의 상위 랭크까지는 한계가 있음.), 건축설계 ‘게임’에서는 현질의 장벽을 넘을 수 없다.
위의 순서를 뒤집으면 얼핏 ‘공정’한 순서인 듯하다. 하지만 어느 레벨부터는 분명 ‘위법’이다. 위법의 경계와 공정의 기준은 레벨 5, 6, 7의 논쟁 꺼리이다. 레벨 6, 7이 레벨 5 이상을 상대하여 이기면 명예롭고 자랑거리이다. 이 경우 게이머들은 현질 유저들의 불참이나 폭탄 싸움으로 덕을 본 것으로 해석한다.

“영업 안 하고 당선된 거야? 대단하군!”
이 질문은 상대를 최소한 레벨 5, 6은 되지 않는가라는 의미를 내포하면서 레벨 7임을 확인하는 말이다. 우수한 계획안으로서 평가받았다는 점은 그다음 얘기이거나 관심이 되지 않는다.
건축설계 ‘게임’에서는 계획안으로서의 우수한 점과 현질을 포함한 영업력의 상관 함수가 ‘게임’마다 복잡하다.
대한건축사협회의 공정의 기준은 어디일까? 당연히 법적 기준보다 높을 것이다. 건축설계공모전에 참여하는 건축(회)사라면 위 분류 중에 어디엔가 속할 것이다. (초보자 경고-준비하고 있는 공모전이 ‘게임’일지 모른다.) ‘공정’의 잣대를 어디에 두고 건축사의 길을 걷고 있는가?

필자는 부끄럽게도 초보자로 시작했지만, 결국 레벨 5, 6을 기웃거렸다. 한두 번 ‘저가 상품권’ 유저가 되어 레벨 3, 4를 시도했다. 헛수고였다. 현질 유저가 참여하면 필패다. 내 나름의 ‘공정’은 ‘게임의 법칙’에서는 저랩(하수)의 변명이었고, 초보자들에겐 ‘오염된 양심’으로 보이는 위선이었다.

공정을 넘어 일상으로 _ 건축설계 공모전은 분명 건축문화 발전에 기여한다. 당선작뿐만 아니라 참가작 하나하나가 건축사의 역량, 건축사사무소의 팀 역량이 발휘되어 완성된 결과물이다. 우리 사회의 건축적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건축담론의 참신한 단면들인 것이다. 당선작의 우수성이 논의되고 축적되는 가운데 우리 사회의 건축환경이 풍성해지고 발전할 것이다.

건축설계 공모전에 내재된 이 순기능은 건축설계 ‘게임’이 존재하는 한 불가능하거나 더디 갈 것이다. ‘K-건축’은 현재 우리 사회가 일궈내어 도착한 ‘K-컬처’에 포함될 수 있을까? ‘K-콴시(關係)’가 떠오른다.
공모전 지침에 충실히 설계안을 만들고, 그 과정에서 실력을 향상하고 건축관을 정립하는 ‘게임’의 초보자들이 ‘공정’의 기준이 아니라 우리 건축설계경기의 ‘일상’이길 소망한다.

“아∼ 당선작이 ○○○대표(회사) 안이었군요. 프로그램 해석이 참신했어요. 공간계획이 전체적으로 과감해 보였고요. 2등 안도 좋았는데, 참신함에서 밀린 거 같아요. 수고했어요.”  건축설계 공모전 결과 발표 후의 이런 콴시(關係)라면 반가운 ‘일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