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껏 도토리 키 재기만 했던가?
총 사업비 48조원으로 국내 최대 규모의 프로젝트파이낸싱(PF)사업이었던 용산역세권 국제업무지구의 개발은 지난 2007년 12월 13일 개발사업자로 국내 대기업들의 컨소시엄인 '드림허브컨소시엄'이 선정된 이후 그 추진에 있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개발사업자 선정 3개월 후 본격적인 사업 진행을 위해 설립된 '용산역세권개발(주)' 창립식에는 서울시장까지 참석, 용산국제업무지구가 세계적인 명품 국제도시로 거듭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용산'이라는 장소성과 개발 지역이 철도청 터라는 특성상 다른 개발사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공공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지난 9월 6일 용산국제업무지구 설계관련 착수식이 개최됐다. 총 3천 2백억 원에 이르는 설계비가 소요되는 이번 프로젝트에 초대받은 건축설계업체는 19군데로 국내 업체는 전무했다. 민간 차원 사업이니 어떤 방식으로 설계자를 고르든 사업자 마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공공기관인 '코레일'이 사업자의 30% 가까운 지분을 갖고 있다. 공공 프로젝트에 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프로젝트는 국내외 건축사들에게 아이디어를 공모해 경쟁시키는 방식이 아닌 외국 유명 건축사들의 이름만 보고 지정, 설계를 맡기는 방식을 취했다. 요즘 경기로 볼 때 분양 실적이 우려, 설계자들의 이름값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군 이래 단일 프로젝트로는 최대 규모인 이번 건축 이벤트를 완전히 외국 스타 건축사들에게만 몰아주면서 열심히 이들의 브랜드만 홍보해주는 모양새가 됐다. 과거 프랑스는 파리 10대 공공건축물인 대형 프로젝트들을 기획하면서 국적을 가리지 않고 가장 뛰어난 건축사들을 경쟁시키는 와중에도 자국 건축사를 일부라도 참여시켰다. 세계적인 이목을 끄는 대형 프로젝트에 이들에게도 경쟁 기회를 주어 세계무대에 알리고 키웠던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남 탓만 할 것도 아니다. 지난 10년간 시장개방에 따른 국제 경쟁력 확보 차원에서 정부는 대형 건축사사무소에 유리하게 법과 제도를 운영했다. 하지만 프로젝트가 클수록 설계사가 시공사에 종속되는 구조로 만들었다. 또한 일정 규모 이상이면 해외 건축가와 협업한다는 단서를 단 프로젝트가 늘면서 뒤치다꺼리만 하는 단순한 로컬 파트너의 역할만 주어진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다 보니 규모가 커짐에도 불구하고 경쟁력 있는 디자인 능력과 기술력을 키우지 못했다. 이 역시 이번 결과의 원인이고 그 동안 도토리 키 재기만 한 꼴이다. 대한민국 건축계의 현주소가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모 언론에서는 명품도시 용산 역세권 개발을 위해 세계 톱 건축설계명장 19명이 꿈의 경연을 펼친다고 기대감을 표현했다. 그 표현대로 전 세계 건축계의 주목을 받는 현대건축의 대형 전시장은 될지는 모르겠지만 실상은 대한민국 건축계의 비극이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자체의 비극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