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공간과 작업

2021-12-07     김학태 건축사 · 작은숲건축사사무소
김학태 건축사

저녁 무렵 우연히 소설가 B 씨가 번역본 소설의 출간일을 앞두고 개최한 독서회 장소인 작은 카페를 찾았다. 그곳에 펼쳐진 빛의 공간은 안도 다다오의 건축만큼 인상적이었다.
오랜 시간을 책상에 앉아 여러 종류의 선을 긋다가 잠 못 이루는 가운데 극장을 찾았다. 조조 시간에는 사람들이 다리를 올리고 누워 관람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애착하는 이곳 지하층에 설계된 상영관은 동굴로 들어가는 듯한 기막힌 경험을 준다. 목적 없이 걷다가 마주친 종로의 골목길 여관의 빛. 비록 연속적이지는 않지만 이들은 어떤 특정한 장소 또는 공간들로서 다층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우연히 들른 어느 상업공간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감동을 하고 여러 차례 일부러 걸음을 해 찾아가 볼 때가 많다. 그곳의 분위기와 더불어 사람들의 움직임, 심지어 그곳의 공기와 온도가 많은 영감을 주기 때문이다. 공간이 시간을 보내며 그곳에 쌓였을 요소들이 심리적으로 중첩·병치되면서 시간을 움켜쥐는 것 마냥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영감을 느낄 수 있다. 혹은 우리네 어느 무의식 속에서 남겨진 부분이 묘한 반응을 일으켜 현재의 공간에 다른 감각을 선사하는 것일지도…. 개인적이고 단발적으로 이어진 장소와 공간들은 최상의 선들로 결합된 평면으로 구성되는 건축물과는 다른 내용과 형식을 담는다. 흔히 쓰이는 텃밭, 마당, 옥외, 광장, 카페, 폴딩, 중정이라는 곳에서….

건축사로서 장시간 선들을 긋는 부력에 잠겨 프로그램을 분석하고 다이어그램을 그리다 보면 습관적으로 고정관념화한 것들이 없는지 스스로 점검하게 된다. 이제는 손이 눈이라는 팔라스마의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컴퓨터로 작업하는 방식에 익숙해져 간다. 트레이싱지에 자를 대고 긋는 작업은 어느덧 오래된 기억으로 가물거릴 뿐이다. 선 하나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각과 의미를 담아내던 방식이 점차 과거의 어느 시기에 존재했을 익명의 건축사를 떠올리게 한다. 음악분야와 비교해 보자면, 스튜디오에 몇 억을 호가하는 값비싼 하드웨어 장비들이 사라지거나 하드웨어를 일부분 남긴 채 하이브리드 작업을 하거나 인 더 박스 방식(아예 하드웨어가 사라진)으로 점차 변화하는 것과 같다.

건축사의 작업이 점차 도면을 그리는 방식에서 머무는 것뿐 아니라 여러 방식으로 확장되어 간다. 도면을 그리는 대신 화가처럼 그림을 그리기도 하며, 구상 단계에서부터 캐드로 작업하거나 면적이 정해지지 않는 오픈된 공간을 만드는 방식을 택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창작하는 입장에서 건축이 표현될 수 있는 방식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책상 앞의 도면과 모형은 뒤로 최대한 미룬 채 색다른 공간을 창출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대지를 걸어 다니며 시간을 보이려고 하는 리차드 세라나 지형의 인문학적 현상을 밝혀내고 순간적인 선들을 포착하여 공간을 엮어가는 방식을 보이기도 한다.

수시로 변화되는 법적 제한과 자본의 가치관이 번잡하게 오가는 현장에서 건축하는 이로 살기 위해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중이다. 비록 고된 행정적인 절차가 끊임없이 제약으로 작용하지만, 건축사로서 또 다른 장소로 인식을 넓혀가며 건축의 의미와 형식에 관해 질문을 던지면서 건축을 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