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건축인으로 산다는 것

2011-09-16     손성기 건축사

변화는 항상 기대한 것 보다 빠르게 다가온다고 했던가.

여성 건축사 자하 하디드(Zaha Hadid)의 동대문 디자인 프라자에 BIM이 적용되면서 근래 몇 년 사이에 급속도로 파고드는 BIM 관련 프로그램은 나에게 또 다시 넘어야할 어려운 과제로 다가온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는데 그 변화를 따라 잡는 속도는 불혹을 훌쩍 넘긴 나이에 늘 힘겨운 도전이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신자재, 신공법 그리고 다양한 정보들은 잠시도 게으를 틈을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주의 마인드와 설계비는 변화에 둔감하다 못해 오히려 점점 굳어지고 있다. 분명 연구대상이다..^^*

추석 명절을 벽두에 두고 새로운 설계 프로그램 교육으로 머리에 쥐가 날 지경에다 연휴 다음날 대학원 박사과정 세미나 발표가 기다리고 있는데도 연휴동안 한 편의 글을 쓰 달라는 선배의 갑작스런 부탁을 딱 잘라 거절하지 못했다. ‘편하게 쓰면 되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자칫 정체성이 모호한 주제의 글이 될까 우려되어 마음의 부담감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3일간의 짧은 명절 연휴동안 치루어 내야하는 많은 일들은 내 복잡한 생각들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결국은 내 주변의 일상으로 지면을 채운다는 명쾌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다니러온 친정을 서둘러 나서는 딸이 못내 못마땅한 친정어머니는 “니는 와 아직도 그라고 사느냐”며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뒤섞인 채 손을 흔들어 주신다. 항상 바쁘고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그다지 윤택하거나 여유로워 보이지 않는 막내딸이 걱정되어 늘 상 하시는 말씀이다.

어릴 적 내 꿈은 스물넷 꽃다운 나이에 시집을 가고 현모양처로 사는 것이었다.

늦둥이로 자라 결혼할 연령을 구체적으로 정할 만큼 나는 젊은 엄마이고 싶었나보다. 그러나 주어진 사주팔자가 분명히 있나보다. 사무실 가장자리에 작은 방을 만들고 마흔에 낳은 늦둥이까지 돌보며 뒤늦은 공부를 하고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간 큰 아줌마로 살고 있다. 딱히 이 시대 이 분야에서 특별히 요구하는 캐릭터상도 아닌데 말이다.

어느 분야, 어느 직업에서나 여성이면서 엄마라는 이름으로 일을 한다는 건 역할이 가지는 범위만큼이나 힘겹고 벅차다는 걸 많이 느낀다. 여러 가지 복잡한 어려운 상황들로 곤란을

겪을 때가 많다는 걸 대부분 공감할게다. 건축을 한지 이십년을 훌쩍 넘어 뒤돌아보니 예쁘게 멋도 내고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젊은 날을 보낸 기억들이 별로 없다. 밤낮없이 일하고 야근하고 하늘 한번 제대로 올려 보지도 못한 채로 항상 앞만 보고 달려왔다. 다다를 목적지도 정확히 모른 체로. 이제는 계속 달리다 보니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도 모른다. 습관처럼 달리다 보니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건축 하는 바보가 되어있는지도 모른다. 다른 분야에서 이십년을 일한 전문직 여성들은 어떻게 살까에 대해 나는 궁금해 한 적이 별로 없다. 사는 게 바빠서였는지 내 직업에 만족해서인지 아니면 상대적 빈곤감으로 내 자존심에 상처를 내기 싫어서였는지 아무튼 후자에 가까울 수 있는 건축이라는 굴레 속에서 잘 버텨와 준 것만으로 나 자신을 스스로 격려하고 인정할 뿐이다.

그렇다 나는 아직 건축하는 바보로 산다는 것에 스스로 행복해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작은 바램이 있다면 다시 시작하는 후배들에게 바보로 살아서 행복했다고 솔직히 말해 줄 수 있는 내일이 오면 진정 좋겠다. 그리고 여성 건축인들의 저변이 점점 넓어져서 나와 같은 길을 걷는 많은 후배들이 이 일에서 보람과 성취감을 느끼며 사회에서 인정받고 살기를 바란다.

조용히 지켜봐주는 남편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밝고 강하게 잘 자라준 아이들에게 감사하며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여성 건축인들의 숨은 노고가 보석처럼 빛날 미래를 감히 기대해본다.

오늘도 내일도 배워야 하는 공부가 남아있고, 꿈꾸는 미래가 있다. 그렇다 나는 아직 건축하는 바보로 살 수 있어서 행복할 수 있다. 바램이 있다면 오래도록 이 일을 하고서도 잘 살 수 있더라고 후배들에게 솔직히 말해 줄 수 있는 내일이 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