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엔 까미노

2021-11-18     김인숙 건축사 · 건축사사무소 세울건 <서울특별시건축사회>
김인숙 건축사

사무실 개소를 결심하기 전, 스페인의 산티아고를 향한 순례길인 까미노로 떠났다. 까미노는 스페인어로 ‘길’을 의미한다. 그리고 부엔 까미노는 무탈한 순례길을 기원하며 순례자들끼리 주고 받는 인사다. 안전하고 부디 목적한 그 곳에 다다르길 바라는... 프랑스 생장 피에드 포트에서 시작해서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775킬로미터의 긴 여정으로 지금은 길도 좋아졌고 마을과 마을 사이에 쉼터도 많아 훨씬 걷기 좋아졌지만 그래도 꼬박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걸어서 목적지에 다다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시는 건축사 자격을 취득한지도 3년이 지난 시점으로 확실히 이정표 없는 갈림길에 서 있음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길을 떠났었다. 그리고 지금은 사무실을 개소한지 어느덧 5년차가 되었지만 아직도 이렇다 할 대표 프로젝트가 없기에 걸음마 단계의 새내기 건축사임은 틀림없지만 지금도 그 때의 그 길을 종종 떠올린다.

배낭을 싸는 일부터 까미노의 여정은 시작된다. 자기 몸무게의 10%를 넘지 않는 무게의 배낭을 싸야하지만, 욕심을 채워 넣다 보면 가방 싸는 일마저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결국엔 적당한 타협으로 여정을 시작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멀리서 애써 들고 온 짐들을 하나씩 버리게 된다. 걷기 시작한 며칠은 그저 아프기만 하다. 어깨에 멍이 들고 물집이 터지고 무릎이 아프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면 그 아픔에 익숙해진다. 배낭이 더 가벼워졌다거나 길이 더 평탄해졌다거나 내 몸이 일주일 만에 천하무적이 된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여정 중엔 다른 순례자의 도움을 종종 받게 되기도 하고 도움을 주기도 한다. 무릎이 너무 아파서 잘 걷지도 못할 때 한 순례자가 자신의 무릎 보호대를 벗어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여정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정도 길이 익숙해지면 비로소 풍경이 보인다. 컴퓨터 윈도우 배경화면 같은 믿을 수 없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갑자기 풍경이 아름다워진게 아니라 내가 그 풍경을 볼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몸이 고단할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익숙해지면 보인다. 그 경험은 까미노 여정 중에 가장 놀라운 경험이었다. 상황은 같지만 ‘나’의 문제로 전혀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 까미노의 목적지는 산티아고 대성당이 아니었다. 여정 그 자체였다. 

크게는 인생 자체가 까미노와 닮아 있지만, 사무소를 개소하고 시작하는 새내기 건축사에겐 다시 새로운 까미노가 시작된 것이다. 생전 처음 사무실 개소를 준비하고,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고, 일이 없는 하루를 불안과 공포로 지내기도하며 막 걸음을 땐 새내기. 이제는 제법 바빠지고 함께 일하는 식구도 생겼지만 아직 ‘익숙’한 단계는 오지 않은 것 같다. 어느 선배의 말처럼 건축사는 모차르트와 같은 꼬마 천재는 없다는 말에 공감한다. 수많은 경험이 바탕이 되어야 비로소 훌륭한 건축사가 탄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걷고 있는 이 까미노가 어디로 향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때의 그 길을 걸었을 때처럼 여정 그 자체에, 매 순간 놓치고 지나는 풍경이 없는지 집중하려 한다. 
지금 시작점에 서 있는 모든 건축사에게 “부엔 까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