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다
건축이 바라볼 대상이 아니라 건축함으로서 바라보는 위치로 자리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소중한 일이었다. 몸에 밴 서양건축은 시각적 대상인 유형(有形)을 만드는 것이었으나, 전통에서 건축을 정의하는 태도는 그 유형 속에서 꾸려지는 (건축을 포함한) 삶을 어떻게 사유(思惟)하여야 하는가의 무형적(無形的) 의미로 읽힌 건 지나친 비약일까? 하지만, 병산서원이나 양동마을에서 느끼던 바였고, 이후 나의 건축이 심히 부끄러웠음은 사실이다.
준공사진을 찍으려다 카메라의 방향을 돌려 세운다. 완성 건물의 어느 창가에서 도시를 문득 바라보면, 정작 다른 부끄러움이 도시적 풍경상실의 허망함 이상의 크기로 다가선다. 얄궂다. 도시적 풍경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풍경이란 서로 공유하는 것이며, 더 옳게는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여유로이 있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리라. 그러나 어디 그랬던가.
우리가 자본주의를 선택하고부터, 도시는 어디까지나 사유(私有)의 집합체였으며, 얽혀있는 가치들은 도시적 열망으로의 건축가의 공간 욕심을 쉬이 허용치 않았다. 땅을 나눠 가질 때부터 자본은 극단으로 나의 배품 보다는 상대방의 양보만을 강요하고 있다. 실례로 시비가 자주 걸리는 일조권을 보면, 빛의 획득을 위한 공간은 마땅히 상대가 확보해 주는 것으로 규정한다. 조망권을 비롯하여 또 다른 어떤 가치나 권리이든 예외이겠는가? 여기에는 내가 양보함으로 공동의 풍경꺼리를 만드는 것을 미덕으로 접근함은 곧 경쟁에서의 실패를 의미한다는 게 자본주의적 원칙이다. 따라서 풍경을 전제로 한 시각적 권리의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 그냥 참으면 되었지 별 애석해 할 것도 없다는 식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냉방기가 토해 내는 열기와 배풍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냄새로 '집비둘기'와 '도시쥐'들의 천국이 되고 있었다. 행정가도, 도시 설계자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건축가들도 은근슬쩍 도시 전문가로서의 책임에서 면책될 수 있다는 데에 안도하며 외면했다. 이 후로 도시에서의 ‘풍경’이란 단어는 그 쓰임새가 참 어색하기만 하였다.
그런 풍경의 허무가 극단화 되면서 풍경을 전제로 뚫은 창 같은 것들이 실제로 막히기도 했다. 사람들은 바깥 풍경을 차단시키고 인테리어로 한정한 범위를 새로운 공간이라 환상한다. '이미테이션'의 풍경을 만들고, 조악한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하는 것만이 고급 환경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마약으로 환각하는 사람의 자기 부정과 다름없이 건축의 존재가치에 병적 상처를 남겼다. 건축은 더 이상 건축이 아니었다. 건축은 틀에 불과한 것이었다. 콘크리트든, 유리든, 틀만 만들어 놓으면, 그 다음은 누군가가 알아서 바꾸어 버리는 허무한 것으로 전락했다.
밤은 또 어땠는가? 낮의 무관심은 도시의 황폐를 부축였다. 그러나 밤은 다른 듯 했다. 사위를 모두 감추고 하나 둘 켜지는 밤의 불빛으로 도시의 풍경을 재창조하려는 듯 조명의 향연이 문화가 되었다. 불을 찾아 몰려드는 불나방의 세계처럼 도시는 그렇게 밤의 것으로 재정의 되고, 낮은 도리어 휴면의 모습으로 물러앉는다. 그러나 그러한 오류 속에서 도시적 상처는 깊어만 간다. 도시의 문화는 점점 밤의 문화에 천착하게 되며, 밝음으로서의 비전이 사라져 감은 도시가 겪어야 할 심각한 질환을 예고한다. 아프다.
누가 먼저 짐을 질 것인가? 결국 도시적 풍경의 회복은 이전의 역사에 남겨 졌듯이 건축가의 눈으로부터 출발할 것이다. 다른 아무도 믿을 수 없는 탓이다. 그러나 모든 건축가들은 유독 내 건물에 집착한다. 남의 것은 눈에 뵈지도 않는다. 여지없이 예술가이기 때문인가? 밖에서 바라보는 유형(有形)으로서의 건축은 건축가가 그 환영에 갇혀도 될 만큼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인가? 그러나, 가끔씩 건축에서 밖을 바라보는 작업은 덜 예술적지만 사뭇 철학적이다. 본질이 무언가? 이즈음에 그런 회의와 고민은 소중하다. 신라의 '김대성'이나, 독락당을 지은 '회재 이언적'이나, 큰 풍경을 고민한 참 건축가들이었다.
도시계획이 도시를 만들어 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틀린 말이다. 도시는 건물 하나하나의 낱개가 모여서 형성되는 것으로, 그 중심에는 생각 있는 건축가가 있어야 한다. 건축가들이 스스로 설계한 도심의 건물에서도 밖을 향해 렌즈의 방향을 돌릴 줄 알아야 하는 이유이다. 그런 걸 우리는 운명이라 불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