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명상입니다
2021-11-04 함성호 시인
눈부신 명상입니다
- 유하
은행잎에 그대가 물들었습니다
그대 노란 눈부심으로
거리를 떠나갑니다
온 산에도 그대가 물들어갑니다
산을 내려온 그대 물든 걸음
사뿐 강물이 받아줍니다
강물 위에 그대 떠내려갑니다
강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며
그대 떠내려갑니다
지금껏 난 흘러가는
그대 붙잡으려 했습니다
지친 매미 울음처럼 붙잡으려 했습니다
아아 온 천지에
그대 수없이 물들고 나서야 비로소
그대 떠내려가는 모습
내게 눈부심이었습니다
그대 떠나보내야
내 사랑 자란다는 걸 알았습니다
은행잎 하나에도
그대 얼굴 물드는 시간입니다
은행나무처럼 나 이제
그대를 소유하지 않습니다
그대 노란 눈부심으로 나를 떠나갑니다
떠나는 그대 눈부신 명상입니다
잔잔한 강물 같은 명상입니다
- 유하 시집 ‘바람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 문학과지성사 / 1991
올해는 가을 없이 바로 겨울로 들어선 느낌이지만 그래도 물드는 나무들을 바라볼 때면 이미 지나가 버렸는지도 모르는 가을에 대한 상념에 빠지고 마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은행나무가 아직도 푸른 건 좀 낯선 계절이긴 하다. 가을은 언제나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고 열매들이 독한 냄새를 피우며 가로에 뒹구는 때아니던가? 계절이 지나가듯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본다. 그게 가을이라면 ‘눈부신 명상’으로 물드는 시간일 것이다.